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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 - 정치학을 중심으로”

voodoo chile 2006. 5. 11. 17:25

원문: http://blog.naver.com/demonic035/90004023847

<아연 민주주의 워크숍, 2006년 4월 28일>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 - 정치학을 중심으로”

최장집/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



1) “한국에서 정치학을 하는 문제에 대하여”, 이것은 꼭 정치학에 해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과학일반에 대한 얘기가 되겠다. 한국에서 정치학을 하기라는 문제는, 학문이란 것이 전 세계가 하나의 사회를 이루어서 나라마다 차이가 없는, 하나로 동질화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특성, 한국적 조건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 정치학이 각각 차이가 있듯이 한국에서 정치학을 한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특성만큼이나 어떤 차이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국에서 정치학을 하는 문제는 두 가지 말이 합쳐져 있다. 하나는 “한국에서”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학”이라는 말이다. 두가지 말 모두 문제를 정의하기 어렵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를 주제로 말한다는 것은 한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정치학의 성격을 보자. 사회과학 일반에 해당할 수 있을지 모른지만, 정치학은 기본적으로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이론적 이성과 실천이성의 구분으로 볼 때 정치학은 후자의 영역에 속하는 학문이다. 물론 兩者는 “초경험적/선험적”(transcendental) 또는 “성찰적 형태”로 종합될 수 있지만 그러하다. 이 구분 자체는 이미 칸트적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구분을 전제로 한 것이라 하겠고, 이것은 이미 내가 칸트학파 내지는 신칸트학파의 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는데, 나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정치학은 자연과학적 인과관계의 틀에서가 아니라 실천이성의 영역 내에서 행해지는 학문이기 때문에, 철학, 특히 사회철학 내지는 윤리학과 아울러 인간경험의 축적으로서의 역사와 분리하기 어려운 학문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학의 태동이 공동체의 윤리, 사회 정의를 정의하는 체제 정당성의 문제와 비교우위를 논하는 데서부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이는 정치학이 왜 어려운가, 그리고 정치학이 왜 경제학처럼 급진적인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기가 어려운가를 말해주는 점이기도 하다. 이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러한 방법론은 다양한 사회를 가로질러 인간의 정치행태와 태도를 요약하거나, 일반화하여 볼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실천적 학문으로서의 경험과학에도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다. 정치학은 실천적 학문이라는 점에서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정치학은 특정 정치공동체와 관련된 역사적, 경험적 문제를 포괄하고, 그 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심적 문제를 다룬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학을 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의 학문/지적 행위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사회에 대한 책임윤리를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들의 ‘목적의지/주의의 윤리’(Gesinnungs-ethik/ethic of ultimate ends)와 ‘책임윤리’(Verantworungs-ethik/ethic of responsibility)를 구분하고, 前者 못지않게 後者를 강조했다. 나는 정치학을 하는 사람 역시 정치인과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수단이 다를 뿐이다. 전자는 학문, 담론의 행위를 통해 정치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정치행위를 통해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전자는 후자에 의존한다. 그래서 정치인 없는 정치학은 생각할 수 없다.





2)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 개별적인 인간관계를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사회적 힘의 관계를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행위는 개별정치인들의 행위라기보다는 집단(합)적 행위에 의한, 이를 둘러싼 경쟁, 갈등, 투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는 지나치게 가치중립적이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윤리적 문제와 결부되어있기 때문에,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 ‘좋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행위이다. 정치학은 이 문제를 다룬다. 정치학은 정치인이 수행하는 집단적 정치행위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전자는 후자에 의존한다. 그러나 정치와 정치학의 관계는 정치에 대해 정치학이 윤리적 성격을 부여하는 역할을 기본으로 하고, 정치학의 목표는 후자가 전자의 영역내로 들어가도록 함으로써 후자가 전자에 의존토록 하는 것이다. 정치학은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당위적, 이상적 목표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정치는 통치와 피통치, 지배와 피지배, 민중과 엘리트, 집단과 집단, 신념과 신념, 가치와 가치사이에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을 둘러싼 갈등, 경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정치학의 퍼스펙티브에서 바라본 정치는 힘의 차이가 유발하는 통치와 피통치, 민중과 엘리트 간 모순, 내지는 간극을 좁히는 행위라 하겠다. 이것은 또한 민주주의정치의 중요성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중요성은 인간의 평등함이란 대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점에 있다. 만약 역사의 발전이 있다면, 그러나 오늘의 일반적 추세가 역사발전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때 역사의 진전과 퇴행이라는 다이나믹스는, 바로 그 배면에서 평등을 실현코자하는 끊임없는 운동, 진행으로부터 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자유, 권리, 정의라는 공동체의 중심가치들은 평등이라는 중심가치로부터 파생되는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주의정치는 기본적으로 “해방적”(emancipatory) 성격을 갖는다. 여기에서 해방적이라 함은, 위계적 지배/피지배의 사회관계에서 피지배적 위치에 있는 민중들의 혁명적 방법에 의한 해방,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서 물질적, 정치권력적 억압의 철폐를 의미하기보다, 인간의 지적,이성적 능력의 회복, 실현을 의미한다. 즉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뜻이다.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은 사회주의텍스트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체제를 변혁하는 것과 같은 혁명성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 오늘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또 다른 어떤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로 대체하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일적 헤게모니, 전일적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으로서 그 결과가 이사이아 베르린이 말하는 ‘가치다원주의’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가치, 사상, 이념의 자유 공간을 의미한다. 오늘의 정치는,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유럽에서든 하나의 지배적 가치가 한 사회와 세계를 지배하는 것에 대립하고, 그 자유의 공간에서 스스로의 일정한 이성적 대안을 실현하려는 집합적 운동이다.





3) 현대 정치학의 가치와 방법론에 있어 보편주의는 지배적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바라볼 때 정치학은 세계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미국의 정치학이 세계의 정치학에서 차지하는 헤게모니적 지위를 통하여 구현된다. 한국정치학의 경향은 미국정치학의 경향을 일정한 시차를 두고 따라가고, 미국정치학의 논쟁점들은 얼마 뒤 그대로 한국정치학의 이슈가 되고, 방법론의 성격 역시 그러하다. 경제학이나 사회학 같은 다른 분야도 정치학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차를 두고 따라가는 문제제기, 문제의식은 한국에서 매우 선별적으로 수용되는데, 즉 미국에서의 지배적 관점/경향은 한국에서 시차를 두면서 수용되어 더 지배적이 된다는 말이다.



내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예로 들어본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했던 1970년대의 분위기는 정치학의 이론과 방법론은 상당히 다양했다. 뒷날 내가 민주주의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미국에서 민주주의이론은 이미 앞 세대들에 의해 거의 완성되었다. 1960년대, 로버트 달, 찰스 린드브롬, 샤츠슈나이더, 데이비드 트루만, 시무어 말틴 립셋, V. O. 키, 미시간 학파, 월터 딘 번햄 등, 약간 뒤늦게 1970년대에 지오반니 사르토리, 테오도르 로위 등이 그렇다. 나는 1970년대 군부권위주의, 종속이론, 국가이론, 민주화이론 등 제3세계문제와 노동문제, 자본주의체제에서의 국가역할, 민주주의로의 이행 등 여러 이론들을 배웠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국에서의 정치상황이 민주화이전이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이론은 큰 관심이 없었고, 권위주의와 그와 관련된 정치경제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 부터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 1960, 70년대의 이론에서 훨씬 더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한국현실은 40년 전보다 더 이전의 연구에서 배울 것이 많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그리스민주주의, 로마/르네상스 공화주의, 17, 8세기의 자유주의, 미국헌법 등을 공부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정치학에 있어 학문발전의 사이클은 한국의 정치현실의 전개와 병행하고 미국의 이론 및 방법론과 병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는,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 다른 사회와 역사적 경험에서 발전한 이론에 대하여 그가 속한 사회가 그 이론과 동일한 문제에 대한 경험을 갖지 않을 때 그는 그 이론의 의미와 진실을 이해할 수 없거나, 한다하더라도 매우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기, 나는 로버트 달이 와서 특강하는 것도 들었고, 미국헌법의 대가인 허버트 스톨링이 같은 과에서 강의했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하베르마스는 『이론과 실천』그리고 『지식과 관심』을 통하여 인간의 지식이란 경험적, 역사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인지적 관심임을 강조하면서, 그 관심이란 이데올로기와 권력구조로부터 해방가능성의 조건을 성찰하는 자기성찰적인 지적행위라고 이해한다. 내가 미국이론에 대해 가졌던 관심은 그러한 문제의식과 유사하다. 자본주의산업화와 노동문제를 경험하지 않고,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정당체제나 선거경쟁, 노동운동의 경험과 이론에 대해 자기성찰적인 지적 관심을 가질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한국현실에 대한 이해를 위해 미국 정치학의 문제나 방법론을 따라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우리가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의 정치학연구나 저서를 볼 때,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다루는 방법이 우리의 것과 매우 다른 것을 보게 된다. 미국의 기준에서 보고, 미국의 것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미국의 정치학을 배우는 것에 관한 한, 세계에서 적어도 양적으로는 미국 다음이라는 생각을 갖는 우리의 눈에는 그들의 학문수준이 상당히 뒤떨어진 것 같고, 우리보다 낮아 보일 수도 있다. 실천적 학문으로서 정치학을 발전수준에 따라 각 나라별로 배열할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한 나라의 정치학자는 그 사회가 대면하는 중심적인 문제를 다루느냐, 그리고 현실 속으로 들어가 얼마나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그 문제와 씨름하느냐, 그로부터 얼마나 그 사회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좋은 대안을 제시하느냐하는 기준에서 평가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정치학도가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의 정치학하기 말고도, 세계정치학의 중심이라 할 미국에서 정치학을 하는 경우에도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성장배경인 모국의 경험과 문제의식을 지닐 때, 그는 그로부터 세계의 보편적인 문제를 보다 더 깊이 있게 천착할 수 있다. 미국정치학계의 대가들, 주요 이론가들은 그들이 미국 외의 국가에 성장배경을 갖는 사람인 경우, 예외 없이 그러하다. 몇 사람만 예로 들어도 이탈리아로부터 지오반니 사르토리, 폴란드로부터 아담 쉐보르스키, 독일로부터 필립 쉬미터나 피터 카첸쉬타인, 덴마크로부터 토벤 아이버슨, 스웨덴으로부터 요나스 폰투손 등 그들이 뿌리를 갖는 국가의 배경을 떼어서 그들의 이론을 생각하기 어렵다.




1920년대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독일대학이 미국화 되어가고 있음을 우려하였다. 학문의 내용과 더불어 장인적 도제제도와 같은 전통적 대학생활이 침식되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학문이 이루어지는 대학생활, 제도가 학문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것임은 물론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제도와 생활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급격하게 미국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과 그 학문의 내용이 미국적인 것이 된다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먼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현실로부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론을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지적 자원 내지는 수단으로 삼는 태도는 정치학 나아가 사회과학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현실에서 이런 태도를 견지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사회과학적 태도에 있어 현실-이론과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전자가 우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두 일본경제학자를 예로 들고 싶다. 한사람은 동경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지금은 은퇴한 宇澤弘文(우자와 히로미)이다. 그는 동경대 수학과 출신으로 순전히 일본인으로서 1960년대 시카고대 경제학과교수로 스카웃되어 미국경제학계에서도 수리경제학 이론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그는 미국주류경제학에 만족하지 않고, 중도에 시카고대 교수직을 사직하고 동경대 경제학과로 옮겨 한때 센세이셔널한 관심을 받았다. 케인지언 경제학과 베브렌과 같은 경제사회학에 깊이 천착하고, 미국자본주의사회의 빈부격차와 교육문제 그리고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역시 일본의 경제학에 대해서도 비판적 자세를 견지했다. 다른 한사람은 역시 일본 경제학자 현 케이오대 경제학교수 金子 勝(카네코 마사루) 이다. 나는 6,7년 전 일본 동경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는데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다. 과거 그는 마르크시슴-케인지언니즘의 이론적 범위 안에 있었는데, 사회주의해체 이후 자신의 이론을 재구축하기로 결심했고, 이후 수년 동안 신고전경제이론의 한 축을 이룬 칼 멩거를 집중적으로 읽었다고 했다. 현재의 문제를 갖되 그에 해답을 줄 고전을 깊이 공부하는 방법이다. 그는 지금 신자유주의의 반대편에 서서 새로운 대안을 발전시키고 있다. 현실을 따라가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론적 정의를 통해 현실을 객관화해 보고 자기 나름대로의 방향을 이론적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이런 자세는 사회과학을 하는 우리가 배울 태도라고 본다. 외래의 이론을 무매개적으로 끌어와 현실분석과 대안의 이론적 기반과 준거로 삼을 때 그 이론 내지 그 이론이 배태된 특정 사회가 모델이 되고, 한국현실은 그로부터 소외되는 주객의 전도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학계에서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이다. 이 경우 정치학은 좋은 사회, 좋은 정치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유지를 안정화하는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의 지식인 시녀로서 역할하게 된다.



4) 여기에서는 “한국에서”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사회가 대면하고 있는 가장 엄중한 문제는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현상은 이데올로기의 강화이다. 그리하여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가 압도적 위력을 갖는다.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왜 문제가 되나? 두 수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이념적 수준에서이다. 신자유주의는 사적소유를 중심가치로 하고 자본의 자유로운 운동을 실현할 시장효율성의 원리를 절대화하면서 공공선, 공적가치를 실현할 정치와 국가의 역할을 그 안티테제로 삼는다. 그럼으로써 정치 그 자체를 부정한다. 더욱이 민중의 광범한 정치참여와 선거를 통한 다수의 결정이 정부를 구성하고, 그 정부가 법이나 정책을 통해서 시장자율성을 침해할 가능성을 갖는 민주주의에 대해 적대적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그것이 지닌 지나친 급진성과 그것이 결과하는 빈부격차의 심화와 사회해체효과 때문에, 그리고 그 이념과 사회현실간의 커다란 괴리 때문에, 사회 여러 부분으로부터 비판되고 도전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큰 결함을 갖는 이념이요 독트린이다. 이러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이데올로기적 전체주의 분위기의 조성에 힘입은 바 컸다. 에릭 홉스봄이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병행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것이라고 말한 까닭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병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일찍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양자 간에 상당한 긴장과 갈등이 있었지만,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병행 발전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나, 아니면 서로 다른 종류의 이념인가? 존 그레이의 『似而非 새벽』(False Dawn)의 논지는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관점을 따르면,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발성, 자율성, 관용, 가치다원주의 등을 그 이념의 중심적 요소로 포함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익명의 힘의 원천으로부터 발원하는 전체주의적, 급진적, 혁명적 이념이자, 프로젝트라는 것이다.



둘째, 그 독트린이 정책으로 실현되는 결과수준에서이다. 새로운 세대의 정치학자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최근의 민주주의이론가들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 퇴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정책적 효과는 여러 수준에서 측정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한 사회의 총량적 성장을 가져오는 효과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의 극소수에 해당하는 최상층의 부만 가파르게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빈부격차의 증대, 시장의 승자와 패자간 격차확대 등 부정적 효과와 함께 커다란 사회적 문제를 창출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광범위한 콘센서스가 있다. 민중들의 정치참여의 축소, 정치엘리트들에 의한 민주정치 과정의 전유, 정당 간 경쟁의 약화와 정당기능의 축소 등,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무수한 부수적 효과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치학하기는 현실적으로 신자유주의와 대면하는 문제라 하겠다. 그리고 그가 민주주의의 가치와 규범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신자유주의와의 관계에 있어 일정한 긴장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물론 이 말은 모든 정치학하는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냐 민주주의냐를 양자택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신자유주의도 하나의 선택이요 대안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리를 준봉하면서 신자유주의와 대면해야 한다. 민주주의 정치학자는 신자유주의를 부정하지 않는 경우에라도 최소한 신자유주의를 완화하거나, 그 진전을 늦추거나, 부의 추구와 경제적 효율성의 전일적 가치에 대응하여 민주주의의 가치, 정치적 자율의 공간, 공적인 가치의 공간을 확대하는 과업에 참여하고 헌신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이는 정치학자로서의 최소한의 요건이다.



5) 한국에서 정치학하기는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학과 실천으로서의 정치학이다. 직업으로서의 정치학은 무엇인가? 대학교수의 정치학이다. 어느 나라나 대학교수는 지식문화영역에서는 물론 전체사회에서 엘리트집단이지만, 한국사회에서 대학교수들의 지위와 역할은 해방이후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으로 인하여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엘리트적 지위를 향유한다. 다른 영역, 즉 정치, 경제, 관계에서의 엘리트공급원이 상대적으로 협소한 한국에서 대학교수들은 모든 영역에 대해 엘리트공급원의 구실을 해오면서 이들의 역할, 지위는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높다고 하겠다. 한국의 민주화는 이 상황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지 못했다. 최근년에 이르러 신자유주의적 실천이 확산?강화되면서 민주정부-보수야당-대재벌/기업계-관계-주요이익집단-주류언론-대학들 간의 지배적 연대가 이루어지고 대학의 교수들은 그 중심축의 하나가 되었다. 한국사회에서의 대학교수들은, 대학의 위계등급이 높을수록 국내-미국의 일류대학 출신들이 충원될 뿐만 아니라 가정배경 역시 한국사회의 상층출신이 많아지는 등, 그 동질적 배경이 강해지는 추세를 나타내게 되었다. 민주화이후 대학교수들은 한국사회의 보수의 수원이자 기반으로서 지위를 갖는다. 한국의 정치학은 그 배경의 당연한 결과로서 압도적으로 미국모델을 수용하고 신자유주의적 지배담론/보수적?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전파하는 지적 주역으로서 교육자로서 매개자로서 기능한다. 대학에서 그것도 주요대학에서 정치학교수가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자동적으로 사회상층엘리트의 구성원이 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학교수, 정치학교수들이 한국현실, 민중문제로부터 괴리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평소 한국사회는 냉전시기 냉전반공주의의 효과로서 이데올로기가 매우 강한 사회라고 생각해왔다. 이는 학문발전에 매우 유해한 효과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 결과는 현실과의 괴리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효능을 갖기 위해서는 일정한 억압적 보조기능을 수반하게 된다. 그것은 이론, 이념, 독트린, 가치의 체계 등 여러 형태를 가질 수 있지만, 문제는 이러한 인지적 틀이 현실로부터 괴리되어 있으면서도 사실이나 현상인식에 대한 판단력을 형성하면서 독자적인 신념이나 가치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현실로부터 생성되는 이론이나 가치의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부과된다는 특징을 갖기 쉽다. 그것은 또한 개인이 사회문제를 보는 인식과 비전을 형성함에 있어 특정의 요소를 극히 긍정적으로, 특정의 요소를 극히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 선별적 가치선호의 스크리닝 메커니즘을 주입하는 기능을 통하여 인식작용, 지적구성, 판단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현실인식을 오도하거나 왜곡하도록 만든다. 이데올로기가 강한 환경 하에서 지식인일반, 특히 정치학자들은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 이를 벗어나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요구된다. 예컨대 미국사회, 미국민주주의에 대한 일방적 이해가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사회의 긍정적 측면을 보되, 그 부정적 측면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데 있다. 미국은 자유주의와 평등의 가치, 시장의 다이나믹, 법의 지배, 무한한 개인적 기회부여 등, 다른 나라가 갖지 못한 무한한 발전과 다이나믹스를 갖지만, 다른 한편 오늘의 미국 민주주의는 정치참여의 저락, 정치경쟁의 약화, 양당체제의 퇴행, 민중적, 민주적 통제로부터 벗어난 국가, 민주주의과정 속으로의 기업이익의 깊숙한 침투와 이를 왜곡하기에 충분한 영향력, 냉전구조를 해체하지 못한데 따른 대외팽창주의적, 제국주의적 헤게모니의 확대라는 심각한 체제퇴행의 문제를 안는다. 신자유주의가 경제성장과 풍요로움을 가져오는 동안, 빈부격차, 소수인종 소외, 범죄, 교육, 건강보험 분야에서 저소득층의 배제 등 사회해체의 효과를 부추긴다. 요컨대 이데올로기는 미국을 있는 그대로 전체적으로 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만 선별적으로 보게 하고 나쁜 점은 보지 못하도록 하는, 이성적 인식을 제한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데올로기는 바깥의 문제를 편향적이고, 선별적으로 보도록 하는 한편, 반대로 한국사회를 보는 시각과 동일한 인식의 고리를 형성한다. 이런 시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사회 자체를 잘못보고, 편향적으로 보게 하는 것보다도 한국사회의 구성과 발전의 모델을 이러한 인식의 기초에서 극히 선별적으로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미국의 현실뿐만 아니라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다른 나라의 장점, 제도를 수용하는 것을 통해 형성될 수 있는 대안형성의 범위를 크게 축소한다. 오늘의 한국의 정치학자들은, 한국의 현실로부터 문제를 끌어내기보다 외국 그것도 일방적으로 미국의 학문적 경향에 스스로를 의탁하기 때문에, 미국의 이론을 제대로 소화하거나 학문수준을 따라가지도 못하고, 한국의 현실에 뿌리내리지도 못하게 된 결과, 어떤 주요한 학문적 연구나, 이론, 업적을 만들어낼 수 없다.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오늘의 보수적 지배질서에 도전하지 않는 한, 그로부터 얻게 되는 보상이 너무 크고, 특권적 지위가 너무 높기 때문에 다른 학문적 행위에 천착할 특별한 인센티브를 갖지 못한다. 이 학문적 성과의 부족분을 메워주는 것은 학술진흥재단이나, 여러 연구비자원을 통하여 양산되는 연구결과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로부터의 문제의식을 갖지 않기 때문에 학문탐구에서 열정을 갖기 어려우며, 갖는다 하더라도 지속하기 어렵다. 그것이 지적 관심이든, 현실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는 것이든 열정을 갖지 않는 학문연구는 살아 생동하는 연구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은 곧 죽은 연구에 불과하다. 오늘의 학문현실에서 양적발전과 질적 발전은 거의 반비례관계에 있다. 과거에도 언제나 그러했지만, 강력한 이론적 힘을 갖는 연구/학문업적은 그 연구자들이 자신이 서 있는 현실에 대한 유보없는 사실주의적, 비판적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왔다. 음악, 미술, 문학 등의 명작들은 작가 자신의 삶의 조건과 사회적 현실에서 때로는 죽음이라는 한계상황까지 넘나들며 온몸을 던져 투쟁하고 고뇌한 산물이자 그 기록이다. 정치학은 그러한 영역과 유사하지만, 현실의 힘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성격 때문에 현실과의 대면에 있어 더 많은 긴장과 갈등을 유발한다.



실천으로서의 정치학은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에 대칭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학문하는 사람들이 직업적 학문영역 밖에서 정치적 실천에 헌신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더라도, 직업으로서의 정치학자가 아닐 이유는 없다. 실천으로서의 정치학은 평등, 자유, 사회정의, 인권의 실현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의 실현과, 또 공동체의 안전과 공동체간 안전이라는 평화의 가치를 실현코자하는 보편적 가치실현을 위한 학문적 실천을 말한다. 플라톤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학의 발전은, 그것이 현실정치에 기여한 것이 있다면, 이 실천으로서의 정치학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실천으로서의 정치학은 현실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양자는 정치라는 현상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근대정치이론을 연,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 프로렌스의 마키아벨리의 이론, 철학을 현실정치와 떼어 이해할 수는 없다. 그것은 현실정치로부터 분리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론이 갖는 현실권력에 대한 위험성 때문에 그의 학문행위, 나아가서는 생명이 위험에 놓였던 경우도 많았다. 스피노자나 록크의 자유주의 이론은 생명이 위협받는 위험 속에서 씌어졌고, 칸트의 철학적 논지도 교회의 검열과 마주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면에서 오늘날 실천적 정치학하기의 어려움은, 그리고 그 어려움 때문에 진정한 정치학이 가능하게 되지 못하는 원천은, 그것이 교회의 권위,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또는 전체주의적 권력에 의한 외적 억압에 의한 제약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기보다, 현상의 유지를 소극적으로 묵인하거나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행위나 역할이 가져다주는 인센티브가 매우 크다는 사실에 있다. 결국 그것은 정치학하는 사람 개인이 현실을 대면코자하는 용기의 결핍과 유약함, 현실안주의 선택에 쉽게 빠질 수 있도록 한다. 그 자신의 독자적인 지적 성장의 결과이든, 헤게모니적 가치의 흡입이나 수용에 의한 것이든, 개인 내면적인 요인의 효과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6)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조건에서 실천적 정치학하기의 요건이랄까, 그에 헌신하는 사람의 (그를 “실천적 정치학도”라고 부르고, 줄여서 ‘실정학도’라고 하겠다) 신조를 생각해 보자.



? 사회의 중심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탐구하고, 그 문제를 적시하고 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오늘날 이 중심문제는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부정적 효과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조건으로부터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곧바로 한국사회의 민중문제이며 노동문제이다. 이 말은 실정학도가 꼭 신자유주의를 반대해야하고, 그 투쟁전선에 나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현실에서 작용하는 과정을 경험적이고 이론적으로 탐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 신자유주의는 그 자체의 문제보다도, 그것이 수반하는 이데올로기적 전체주의화가 더 큰 문제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이데올로기적 전체주의가 다른 이념적 대안형성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에 대응하는 노력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산하는 것으로서, 인간을 경제적 효율성, 생산과 소비의 단위, 부와 소유의 가치가 아닌, 평등, 자유, 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전인적 가치를 그에 병립시키는 내용을 갖는다. 실정학도는 반드시 신자유주의의 경제과정 자체, 그것이 있다면 그것이 창출하는 여러 효과 가운데 긍정적 효과 역시 가능하며,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철학, 그것이 인간사회의 공동체와 연대를 해체하고, 인간을 경제단위로 단순화하는 철학에 반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 문제의 중심 명제는, 실정학도가 하는 정치학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 정치를 경제로 환원하거나, 정치학을 경제학의 이론적, 개념적 장치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실정학도의 정치학의 출발점은 한국 민중의 삶의 현실인 오늘의 한국사회이다. 모든 과거와 현재의 정치이론과 외국의 사례들은 한국현실을 해명하고 해결하고, 그 개선을 위해 봉사하는 정도에 따라 중요성을 갖는다. 미국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 어떤 문화적, 지적 반미주의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실정학도는 한국현실을 중심으로 한 준거로부터 그 중요성과 장단점을 평가할 뿐이다. 어떤 사회도 일방적으로 수용되거나 비판될 수는 없다. 실정학도는 어떤 사회에 대해서도 한 사회를 전체적으로 단순화시켜 규정하지는 않는다. 미국에 대해 부정적/비판적으로 보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미국사회 그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도 문제려니와 한국사회발전에 있어 미국이 전일적 모델이 될 수 있는가 하는데 대한 회의이다. 한국사회와 미국사회의 차이는 구조적이고 근본적이다. 사회구조와 규모, 문화, 역사경험 등 모든 면에서의 커다란 차이로 인하여, 미국을 닮으려 해도 그럴 수 없다는 제약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오늘날 한국에서의 실정학도는 그가 의지하고 따를, 이미 존재했거나 현재 존재하는 어떤 기존의 이념이나, 가치체계/신념의 체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은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정향 같은 것은 필요하고, 또 그것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공유해야 할 기본선은, 칼 폴라니의 문제의식, 즉 시장경제가 초래하는 사회해체효과에 대응하는 시민사회에 의한 사회공동체적 대응, 즉 사회보호의 중요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점에서 실정학도는 이러한 출발선을 바탕으로 하여, 그 가치의 틀 안에서 경험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새로운 이론을 형성해야할 과제를 안는다.



? 실정학도에게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에 맞설 수 있는 적지 않은 용기가 요구될른지 모른다. 헤게모니에 맞선다는 것은, 그가 향유할 수 있는 특권적, 또는 기득권적 지위나 사회적 보상으로부터의 소외나 그에 대한 포기를 감내해야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실천적 행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지적 탐구의 자세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실정학도는 그가 지속적으로 실정학도가 되기 위하여, 또 이들 간의 집합적 정치학하기의 필요로 인하여 집단적으로 연대하고 결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의 한국사회를 에드워드 밴필드의 이탈리아 남부의 극빈한 몬테그라네시 마을을 모델로 한 “무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 개념을 원용하여 특징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핵가족의 물질적, 단기적 이익추구는 사회를 움직이는 동인이다. 공동체의 공동 관심사가 있다면 그것은 단기적, 물질적 이익추구의 전망뿐이다.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상황은 헤게모니 밖의 개인들이 공동의 관심사를 통하여 결속하는 일을 어렵게 하는 강력한 해체효과를 갖는다. 헤게모니는 공중에 떠다니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물질적 기반을 갖는다는 것이 강조될 수 있다. 헤게모니는 한국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포괄한다. 따라서 실정학도가 헤게모니에 도전해야 한다면, 이들은 결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다수의 결속이라기보다는, 소수의 여러 그룹들의 결속이 중요하다. 그리고 실정학도는 이 과정에서 그들 스스로 정치적 집단으로 움직여야 할지 모르고, 이를 회피할 필요는 없다.



? 실정학도는 막스 베버의 말대로 “목적의지의 윤리”와 “책임윤리”를 함께 가질 것이 요구된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참여자들이나 민주화이후 정치엘리트들이 보여주는 것은, 목적의지의 순수성, 윤리가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이 논리는 운동의 도덕성과 순수성 그 자체가 수단을 정당화하고 그 목적의지가 만들어내는 결과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지 않는 태도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책임윤리이다. 도덕성과 순수성, 변혁의지가 아무리 고매하다 하더라도 집단이든, 개인이든 주관적인 자기평가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목적의지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행위의 결과를 통하여 대중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한 의미를 갖지 못할 뿐 아니라 해악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념이든, 집합적 행위의 목적의지이든, 과도한 집단적 열정과 신념은 일정하게 제어되는 것이 필요하다. 집단적 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필연적으로 사회적 결과를 만들어내는 지적 행위와 작업은 극도의 분별력과 사려깊음이 요구된다. 이것은 우리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민주정부를 경험하면서 얻을 수 있었던 교훈이기도 하다.



? 실정학도가 되기 위해 총체적 자기결단을 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그것을 부정해야 한다. 실정학도는 민주시민에 불과하고, 그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그는 정치학이라는 지식을 통하여 사회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시민일 뿐이다. 시민이 총체적 시민됨을 부정해야 하듯이, 시민으로서의 실정학도 역시 일상성 속에서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일에 복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