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상

집에서 전화가왔다. 연락이 뜸했던지 내 근황이 궁금하셨나보다.

아버지는 내가 준비하는 일이영 신통치 않아 뵈는지 혀를 끌끌 차시고, 나도 그냥 적당한 선에서 응수해 드린다. 잘 될 꺼예요!

어머니는 좀 집요하다. 특히나, 오늘과 같은 일요일(우리 어머니는 역시 '주일'이라 부르는데)에 전화가 오면 반드시 물어보는 말이 "오늘 교회에는 갔다 왔지? "

그럴 때마다 나는"어~,음~,엉~" 그냥요렇게 애매한 대답으로 어물쩡 넘어가려 하는데도, 어머니는또 재차확인을 하시는 것이다.동시에 성경읽어라, 기도해라, 등등의 주문을 빼놓지 않으시면서. 알았어, 알았어, 그러면서 난 딴 애기로 화제 돌리기.

이런 내용이 다는 아니지만,가끔 걸려오는 일요일의 집전화에서 레퍼토리의중요한 부분은 내 신앙상태의점검이다. 내 나이가 몇살이고, 내가 무슨 의식을 가진가에 대해서 어머니는별 중요치 않게생각하시는 듯. 물론 내 신앙 생활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어머니는 충분히 짐작하고 계신다.알면서도 물어보는 것은 내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내 방의 성경엔 먼지가 쌓인지 오래다만,그래도 이런 전화를 받을 때만큼은 내 양심 한구석이 조금 찔린다. 왜 그럴까? 부모님께 거짓말 한게 죄송해서? 꼭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다른 거짓말하면서 별 죄책감 못느낀 적도 많았으니까.보다는 내 안의 신심이 쇠락했다는 아쉬움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난 예전에 안그랬는데...그래, 난 비록 신의 존재가 무척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그 곳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어제 잠깐 들른 책방에서 이오덕 선생의 글을 서서 훑어읽었더랬다. 제목은,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 기억 나는 부분중에 자기가 농사꾼이 되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세상의 지식으로 부질없는 번뇌를 일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자신의 순수한 무엇을 지키고 살았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그의 후회가 참으로 나에게신선한 교훈을 주었다라고 말하면 그건 위선일 것이다.그가 농사꾼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나도 농사꾼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잃어버린 것들이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해야 한다는생각이 들었고, 그는 그것이 무엇이었나를 그 나름대로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그의 말대로 세상의 지식이 진정으로 나의 행복한 삶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것은 나의 순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나의 경우, 돌이켜 보건대,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는 종교인으로서 순수하였나? 그전엔 그 순수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의 중심이 중요한데 흔들린건 사실이다.

나의 신앙과 세상의 지식은 애초부터 공존할 수 없었던 것이었는가? 그럴 기미를 감지해왔다.

그렇다면 나는 학문하는 자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노력한다.

어떤 식으로? 회의를 통해서.

난 모든 것을 회의할 수 있는가? 한계의 극단까지 생각하려 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신앙을 회의하는 것과 기존의 믿음, 지식, 학문 체계를 회의하는 것은 같은 것인가? 그래야 한다, 슬프게도.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가? 신앙과 과학의 종합을 누가 나에게 알려다오.

내가 진정으로유물론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선 그 말의 어감이 싫다. 그런데 과학은 유물론이냐?

그렇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내안에 타인을, 사물을 공경하는 마음이 존재하는가?그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

예전, 학부 교양 영어 시간, 김우창 샘이노동자가 8시간 노동하는 것 만큼 공부하는 사람도 최소한 그리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이후로 난 그 말을나의 직업윤리로 삼고자 하였다.그의 권위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 목적이 무엇인가가 막연하였지만,공부를 하는자세를 가다듬는 데 그보다 더 단순 명쾌한 말은 듣지 못했다. 지금은 나태해진 나 자신을 책망한다.

아직 내가 신앙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그리로 돌아갈 수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에 난 아직도 유보적 자세를 취한다.우선 마음이 일지 않는다. 한편으로,번뇌없는 삶이어디있을 것이며, 내가 신앙을 되찾는다 해서,내 얄팍한 지식이 사라지는 것이아닐 거라면,세속적 고민은 계속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찾으려고 이러는가를 되돌아보기에 아직 내 나이가 젊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모르겠다.

누가 나에게 무엇을 추구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직할 말이준비 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우선 일을 하고 싶고,그 결과를 보고싶다. 온전히 일하는 삶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요즘이 괴롭다.

농사꾼이, 종교인이 어떤 순수한,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는 주제 넘은 판단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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