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ic writing

육체문학에서 육체정치까지 2

voodoo chile 2006. 5. 9. 12:38

A: 그러니까 허위의 철학을 내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과 우리의 관심사인 근대사회의 형성과는 무슨 관련성이 있는 것이지.


B: 자아 아무 말 말고 좀더 들어봐. 그런 대로 이 정도라도 픽션의 의미를 말해두면 앞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러면 시작해볼까. 근대사회의 형성이라는 것은 당연히 중세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는 측면과, 그 폐허 속에서 새로운 시민사회를 건설해가는 측면, 두 측면을 가지고 있지. 그런데 그 양면이라는 것은 그것이 수행되기 위한 사상적 전제로서, 무릇 사회의 질서나 제도 그리고 관습, 요컨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 모두 인간의 산물이며, 인간의 지성의 힘으로 바꾸어갈 수 있는 것이라는 자각이 생겨나는 것이 제일 먼저겠지.


A: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B: 그런데 그게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닐세. 거기에 포인트가 있어. 중세처럼 인간이 출생이나 신분에 의해서 위계적으로 위치지어져서 사회관계가 고정되어 있는 곳에서는, 그런 인간의 사회적 환경이 마치 산이나 해나 별이나 달과 같은 자연적 실제성을 띠고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었지. 본래 일정한 목적을 가진 제도에서도, 그것이 환경 속에 가라앉게 될수록, 주어진 것으로서, 즉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히 생겨난 것으로서밖에 의식할 수 없으며, 따라서 어떤 목적에서 그런 제도가 있는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대체로 그런 사회에서는 분명한 ‘제도’를 만들 필요도 그다지 없을거야-이것은 곧이어 말하겠지만ㆍㆍㆍ. 그러므로 그런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당연히 픽션이라는 생각은 나오지 않으며, 나오더라도 지배적으로는 되지 않지.


A: 사상사로 본다면 언제쯤부터 그런 생각이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는데ㆍㆍㆍ.


B: 글쎄다. 대체적으로 후기 스콜라철학으로 불리는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나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cam)의 시대부터라고 생각해.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겠지. 보편개념은 실제한다는 성(聖)토마스 등의 정통적 입장에 대해서, 유명론자들은 보편개념은 모두 인간이 편의상 만들어낸 것이며, 실재하는 것은 개체(個物, individual things)뿐이라고 주장했던 거야. 사회의 규범이나 질서의 선천적인 구속력을 부정하고, 그것을 인간의 ‘픽션’으로 파악하는 생각은 이미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유명론과 실재론의 투쟁도 중세 초기부터 있긴 했지만, 중세적 질서의 해체라는 역사적ㆍ사회적인 기반과의 관련성을 문제삼을 때에는, 역시 후기 스콜라학파의 등장이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


A; 르네상스 이후가 되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 발전하게 되지.


B: 그것도 자세한 것을 말하게 되면 끝이 없지만, 그 왜 17,8세기를 지배했던 사회계약설 있잖아. 그것이 말하자면 유명론의 적자(嫡子)지. 사회계약이라는 생각에도 실제로 다양성이 있지만, 어쨌거나 중세나 동양의 옛날 사상에도 있는 (군주와 백성 사이의) 군민(君民)계약설 같은 것으로부터, 근세의 사회계약설이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은, 개인을 유일한 자연적 실재로 보고, 사회관계를 모두 개인의 목적의식적인 산물로서 이해해간 것이지. 원자론적인 사유방법은 비역사적이라든가 기계적이라든가 하여 후세에 자못 평판이 좋지 않지만, 거기서 철저하게 인간을 환경으로부터 분리시켜서 생각했기 때문에, 뿌리깊게 얽혀 있던 인습이나 역사적 관행을 단절하는 주체적인 에너지도 생겨났던 것이지. 물론 거꾸로 그런 생각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봉건적인 사회관계의 해체의 징표이며, 자연과학적 방법의 영향이나 다양한 계기를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말야. 다만 사회계약설의 ‘계약’이라는 것이 애초에 고도의 픽션이라는 것은 루소나 칸트의 계약설까지는 분명하게 자각되지 않았으며, 그때까지는 원시계약을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서 근거짓는 경향이 강했다는 것은 그만큼 아직 제작의 입장으로서는 불철저했던 것이지.


A: 잠깐 거기에 의문이 있어. 이전에 무슨 동양사상에 관해서 쓴 책을 읽었더니, 유럽의 정치사상이 생각했던 것은 사람보다도 제도라는 것이며, 거기에 대해서 동양의 사고방식은 제도나 기구보다도 우선 인간이라는 의미의 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것과 자네가 말한 유럽의 근대정신은, 어쩐지 얼핏보기에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는데, 자네의 규정에 의하면, 제도의 자연적 소여성(所與性)을 부정하고 그것을 만드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강조하는 것이 근대정신이라는 식으로 되는데ㆍㆍㆍ.


B: 실은 말야. 바로 지금 그 문제에 대해서 말하려고 생각하던 참이라구. 확실히 자네가 말한대로, 동양의 옛날로부터의 사상에는 일종의 인간주의(humanism)가 있어. ‘요컨대 조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물의 문제’라는 말은 오늘날의 일본에서도 이따금 들을 수 있는 말이지. 무엇보다도 동양의 정치사상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거기에는 유럽의 그것에 있는 그런 조직론이라든가 기구론과 같은 유(類)의 그것은 거의 없다시피 해. 대부분이 정치적 지배자의 ‘인격’을 연마하는 논의거나 아니면 통치의 술수(knack)에 관한 논의지. 고전으로 말하면 사서오경은 전자의 전형이고, 『한비자』(韓非子)나 『전국책』(戰國策)은 후자의 좋은 예가 되겠지. 어느 쪽이거나 거기서는 안간과 인간의 직접적ㆍ감각적인 관계밖에 문제가 되고 있지 않아. 조직이나 기구와 같은 것은 본래 사회관계를 감성적인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로 방임하지 않는 곳에서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 그런 의미에서는, 유럽에서 그런 ‘조직’이나 ‘제도’가 진정으로 발달한 것은 근대 이후이며, 따라서 중세의 정치사상을 보더라도 동양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역시 조직론은 빈곤해.

그러면 이같은 전근대적인 인격주의(personalism)와 근대사회의 ‘인간의 발견’이 어떻게 다른가 하면, 전자에서 존중되는 ‘인간’이란 실은 처음부터 관계(relationship)를 내포하고 있는 인간, 그 인간의 구체적인 환경까지 합쳐서 생각되는 그런 인간이라구. 그래서 도덕이나 사회규범 같은 것이 이미 알고 있는 관계에서만 통용된다는 것, 이미 알고 있는 관계에서의 의리깊음과 알지 못하는 관계에서의 파렴치한 행동거지가 공존한다는 것, 어떤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지배력이나 영향력이 지위나 신분 그리고 가문이나 ‘얼굴’과 같은, 요컨대 전통에 의해 신성화된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같은 것들이 그런 ‘인간’주의의 구체적인 표현이 되지. 거기서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군주도 영주도 가장(家長)도 아니며, 실은 전통이라구. 그같은 사회의 각각의 서클에서의 지배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얼마나 부자유스러우며,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모두 의례(儀禮)와 관습에 얽매여 있는지는 달리 예를 들지 않더라고 충분하겠지. 그런데 인간이 그야말로 처음부터 ‘관계를 내포한 인간’으로서밖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관계’는 관계로서 객관적 표현을 취하지 않아. 그리고 법과 관습이 분화되지 않아서 관습법이 실정법보다 우월하지. 그러므로 거기서는 인간과 인간이 마치 어떤 규범도 매개로 하지 않으며, 또 어떤 번거로운 규칙이나 조직도 매개로 하지 않고서 ‘직접’적으로 한 집안같이 지내는 것처럼 보여. 실은 억압과 폭력이 전통화되어 있기 때문에 의식되지 않을 뿐이지만ㆍㆍㆍ.

근대사회처럼 인간이 고정적 환경으로부터 분리되고, 알지 못하는 인간 상호간의 수많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미 알고 있는 관계를 전제로 한 전통이나 ‘얼굴’은 점점 쓸모가 없어지게 되지. 그러므로 객관적인 조직이나 규칙이 ‘얼굴’을 대신하게 되고, 인간상호간의 직접적ㆍ감성적 관계가 점점 더 매개되는 관계로 바뀌게 된다는 측면을 보게 되면, 근대화라는 것은 인격관계의 비(非)인격화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습에서 깨어나 그런 규칙이나 조직을 고안해내고 만들어가는 주체로서 자신을 자각하는 측면으로 본다면, 그것은 거꾸로 비인격관계의 인격화라는 것으로 되어버리지. 그런데 그 두 측면이 서로 본래적으로 모순하는 것은 아니야.


A: 그러나 전통이나 관습이라는 것도 원래는 인간이 만든 것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른바 근대적인 제도나 규칙도 얼마 후에는 그 자체가 전통처럼 거꾸로 인간을 절대적으로 구속하게 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B: 그래, 그렇다구. 앞에서도 잠깐 말한 것처럼 인간이 만드는 것은 만들어지게 되면 곧바로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인간의 환경 속에 편입되어가지. 그리고 그것이 환경으로 고정되면 될 수록, 그만큼 질료성(質料性)이 늘어나서 자연적 실재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게 되지. 이른바 전통적인 풍습이나 관행 같은 것은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아마도 ‘픽션’으로 출발했던 것이지만, 자연적 실재에 가장 근접해서 픽션으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을거야. 픽션의 본질은 그것이 스스로 선천적 가치를 내재한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어떤 편의를 위해 무언가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상대적 존재라는 점에 있지. 그러므로 만약에 제도나 기구가 그것이 쓰여야 할 목적에 비추어 끊임없이 재음미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른바 굳어져서 관습처럼 되어버리고 말아. 픽션의 의미를 믿는 정신이라는 것은 일단 만들어진 픽션을 절대화하는 정신과는 그야말로 정반대이며, 오히려 본래 픽션의 자기목적화를 끊임없이 방지하고, 그것을 상대화하는 것이지. ‘허위’는 ‘허위’라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사실’로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이미 ‘허위’로서의 기능은 다할 수 없게 되지. 정말 끊임없이 깨어 있지 않으면 어느 틈인가 ‘허위’는 ‘사실’로 되어버리고 말아.


A: 언젠가 자네가 말한 일본인의 실체화적인 사유 경향이라는 것이 어쩐지 지금 말한 것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래.


B: 그래.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인간이 사회적 환경을 자연적 소여(所與)로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한 곳에서는, 그만큼 픽션도 굳어지기 쉬우며, 따라서 본래 어떤 편의를 위해서 마련된 제도나 조직이 효용을 벗어나 실체화한다구. 목적과 수단 사이의 끊임없는 매개를 행하지 않기 때문에, 수단은 곧바로 자기목적화해버리는 것이지. 오랜 전통을 등에 업고 있으며, 게다가 그 존재이유를 ‘묻는 것’자체가 터부시되던 천황제가 모든 사회적 가치의 근원으로서 가장 강고한 실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지금 새삼스레 말할 것까지도 없지만, 본래 근대적인 제도까지 여기서는, 옥신각신하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위로부터 이식되었기 때문에 국민에게는 픽션으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전통적인 지배관계와 같은 평면에서 실체화하는 경향이 있어. 예를 드면 의회제도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인데, 의회제야말로 다양한 국민적 이익을 조직화해서 국가 의사(意思)에 매개한다는 기능의 가치를 떠나서는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는 제도인데, 종래 일본의 정당이나 의회는 반드시 그렇지 않으며, 군부나 관료나 중신 등과 나란히 서는 그 자체 하나의 실체적인 정치력 같은 것이었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대정익찬회(大正翼贊會)와 같은 보잘것없는 조직이 국민재조직이라는 식의 염치없는 깃발을 들고 등장했을 리가 없지. 제국의회는 처음부터 메이지(明治)헌법의 대권주의에 의해 지위가 약화되어 있었다는 핸디캡이 있었던 것인데, 새 헌법처럼 의원내각제의 원칙이 지켜지고 게다가 거기서 사회적 이해의 통합기능이 충분히 행해지지 않게 되면, 국회 그 자체가 거대한 권력체로 변해버릴 위험이 없는 것도 아니지.


A; 그와 동시에, 끌어당기는 펌프가 위쪽에서 관이 막혀버리게 되면, 물의 기세가 격하면 격할수록 관을 깨부수고 범람하게 되어 수습할 수 없게 됨과 동시에, 의회로 통합되지 않는 에너지가 비합리적으로 폭발할 수 있는 위험성도 있겠지.


B: 그것은 의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민주적인 조직, 예를 들면 노동조합도 그렇다고 할 수 있어. 대체로 근대국가 내부에서 사회적 분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점점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직접성을 읽고 조직이 끼어들어 각종의 이익단체, 결사, 압력단체가 복잡하게 경합하여 각각 개별 의사(意思)의 조직화 활동을 활발하게 행하고, 동시에 각 그룹 내부의 기능적인 분업-서기국이나 섭외부와 같은 부서의 형성-도 진행되어 가는 것인데, 그럴 경우에 제도의 외면적인 합리화와 의식구조의 능동화 사이에 틈새가 있게 되면, 하나하나의 조직이나 부처가 가장 중요한 사회적 분업으로 기능하지 않고 곧바로 실체화해버리지. 그렇게 되면 분업은 할거가 되고 전문(專門)은 자기구역이 되어버려. 그렇게 되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기술적 관료화가 실질적 관료화로 변용해버리고 말아. 그런 나라가 어쨌든 간에 근대국가로서(?) 외면적으로 정리되면 될 수록, 그 내부에는 아무리 해도 움직이지 않는 무정부상태가 뿌리를 내리게 되지. 그렇지 않아도 현대처럼 다양한 조직이 방대해지게 되면, 그것이 모두 인간의 통제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서 리바이어던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에ㆍㆍ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