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문학에서 육체정치까지 3
A; 얘기가 어쩐지 점점 더 무서워지고 있구먼 그래. 바이마르시대의 독일에도 역시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B: 그래. 비슷하다고 생각해. 어느 학자가, 복수정당 국가(Parteinstaat)로서 출발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하나하나 정당이 그 자체가 국가로 되어버려, 국가 속의 국가가 몇 개나 형성되어 정치적 통일을 상실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정당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면에서 동맥경화가 나치즘의 제패를 준비한 중요한 조건이었음에 틀림없어. 나치즘은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곧바로 이른바 획일화(Gleichschaltung)로, 민주적인 통합 대신에 위로부터의 권력적 균일화를 실시했어. 물론 그 성공에는 복잡한 요인이 있지만, 만약 그런 정당이나 노동조합 등의 조직이 순조롭게 자주적인 매개작용을 하고 있었더라면 아마도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야.
A; 그러면 파시즘이란 것은 근대사회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서, 사람들이 근대적인 픽션의 의미를 믿을 수 없데 된 그런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인가.
B: 그렇지. 그것도 심한 기형아지. 즉 근대사회의 조직적 분화로 인해 생긴 병리현상을, 이른바 문화이전의 직접적 자연성으로의 복귀-피와 흙-에 의해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지. 나치의 어용학자는 근대데모크라시의 핵심을 이루는 ‘대표’와 ‘다수결’이론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그런 것은 모두 픽션이며 진실된 민의의 표현이 아니다, 그런 기만적인 제도와는 달리, 지도자 히틀러야말로 참된 독일 국민의사의 표현자다, 히틀러와 국민의 관계는 선거에서 머릿수를 헤아린다는 ‘기계적’인 방법을 매개로 하는 차가운 관계가 아니라 좀더 유기적이고 정서적인 결합이며, 그것은 선거 같은 것보다도 대중의 갈채 속에 훨씬 더 잘 표현되어 있다, 뭐 이런 식으로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었지. 실제로, 경제적 위기에 쫓겨서 격화하는 사회불안에 정신적 안정을 잃어버리고, 의회정치의 무능함에 절망한 대중-특히 조직되지 않은 대중이 정상적인 민주적 통합과정을 믿을 수 없게 되어서, 자신의 바람이나 욕구불만의 직접적인 판로를 절대적 권위와의 비합리적인 합일 속에서 찾아가는 것이지. 짐멜(Georg Simmel)이 제 1차세계대전 직후에 『근대문화의 갈등』(The Conflict of Modern Culture)이라는 작은 팸플릿 속에서, 역사의 과도기에는 언제나 삶(Leben)이 자신을 담을 수 없게 된 형식을 버리고 보다 적합한 형식을 만들어가게 되는데, 현대는 ‘삶’이 낡은 형식에 만족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릇 형식 일반에 반역하여 자신을 직접 무매개적으로 표출하려고 하는 시대이며, 바로 거기에 현대의 가장 심각한 위기가 있다는 의미의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말을 들으면 어쩐지 자꾸 위에서 본 나치 학자의 주장과 비교해서 생각하게 되지. 그런 식으로 말하니 누군가 히틀러에게는 ‘형식에 대한 증오’가 있었다고 하더군. 나치발흥의 정신사적 배경이라는 것은 정말 뿌리가 깊어.
A: 그러나 나치가 근대의 사회적 분화에 기초한 기능적 통합에 반역했다고 자네는 말했지만, 나치만큼 방대한 조직망을 펼쳐서 근대과학과 기술을 대중의 조직화를 위해서 동원한 체제도 역사적으로 드물지 않은가.
B: 바로 그 점이 아이러니컬한 점이야. 아무리 나치가 게르만 숲의 생활을 동경하고 피와 흙에 의한 원시적 통일을 주창하더라도, 그런 것은 현실의 정치적 지배기구를 만든다고 할 때 통용될 리가 없는 것이지. 특히 나치국가라는 것은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무장한 국가이므로ㆍㆍㆍ. 그래서 현실적으로 나치가 한 것은 그때까지의, 자발적인 조직이나 그룹을 해체하고, 방대한 공권적인 지도자조직 하에 대중을 재편성했을 뿐이지. 그런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서 내놓은 것이 바로 신화라구. 근대적인 픽션을 깨부순 후에 나타난 것이 바로 뮈토스(Mythos)였어. 게다가 그런 ‘20세기의’ 신화라는 것은 원시 신화와는 달라서 오로지 정치적 선전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마 그 이상으로 열악한 작품은 없을거야.
A: 그런데 왠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아. 매개된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서 직접 생생한 그대로의 감각을 파고들려는 ‘실화’(實話)정신이 횡행하고 있는 국가는 방심해서는 안되겠구먼.
B: 일본의 경우는 독일보다 한층 더 복잡해. 어째서 그런가 하면 나치즘은 어쨌거나 근대의 사회적 분화가 이미 상당한 수준에까지 진행된 기반위에서 출현한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아직 전근대적인 사회관계가 뿌리 깊게 남아 있어. 그러므로 원래 근대적인 조직이나 제도가 그저 본래의 기능을 하지 않기 때문에 경화할 위험성만이 아니라, 애초에 처음부터 그런 조직매개를 거치지 않고서 사회적 조정이 이루어지는 ‘장’(場)이 매우 넓은 것이지. 적나라한 폭력, 테러, 협박으로부터 시작해서, 보스ㆍ오오미도코로(大御所)ㆍ오야분(親分)ㆍ카오야쿠(顔役) 등이 행사하는 은연한 강제력이 이르기까지 모두 그것은 직접적인 인간관계를 지반으로 하는 문제처리방법이지. 그런 힘이 사회적ㆍ조직적 분화를 아직 강인하게 저지하고 있어. 그러므로 만약 장래의 파쇼적 권력이 그런 지반을 조금이라도 동원하는 데 성공하게 되면, 정당이나 조합이나 각종의 결사 등의-그렇지 않아도 미약한-자주적 조직 같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분쇄되어버리고 말거야. 어쨌거나 그런 단체의 구성원 자체에서 번거로운 조직을 통한 절충보다도 손쉽게 ‘직접’ 행동에 호소하자고 속삭여대는 ‘사자 마음 속의 벌레’라는 것이 그렇게 드물지는 않으니까. 그런 나라에서는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체는, 전근대적 사회관계의 진흙밭을 겨우 통과하는 하나의 길을 걷고 있다는 자각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그 길이 좀 멀고 빙 돈다고 하면서, 진흙밭은 계속 그대로 통과하려고 한다면 결국에는, 거기에 빠져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될거야.
A: 자네의 이른바 정신이 감성적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곳에서는 정치적 정신 역시 폭력이나 ‘얼굴’이나 ‘배’같은 정치적 육체에의 직접적 의존을 벗어나지 못하겠지. 자네가 앞에서 일본인의 생활에 ‘사교’가 없다는 문제를 내놓았지만. 사생활에서의 ‘사교’정신은 공적인 생활에서의 ‘회의’(會議)정신에 해당되지 않는가. 제1국회라 하지만 역시 여기저기서 금세 후끈 달아오르니까 정말 기가 막히지 뭐.
B: 후끈 달아오르는 것은 정치적 육체라기보다는 단지 육체일 뿐이지. 예를 들어 국회의원이 선거민을 향해서 개별적ㆍ사적 이익을 직접적으로 만족시키는 그런 호소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기업이나 토지유력자의 이해를 직접적으로 대표하여 행동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정치적 정신의 차원이 독립되어 있지 않은 증거라 할 수 있지. 정당은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일본의 이른바 ‘부르주아’정당 등의 내부 사정을 듣게 되면, 정당의 구성원이 각각 특수한 인적 관계나 배후의 재정지원자 등에 이끌려서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어서 그야말로 정당으로서의 통일이 없어. 리더십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정당 이전에 머물러 있어.
A: 마치 일본의 사소설이 개개의 감각적 경험을 다발로 묶어놓았을 뿐이며, 픽션으로서의 내면적 통일성이 없는 것에 조응하는 그런 현상이로구먼.
B:자네도 내게서 감염되어 그야말로 소이탄(燒夷彈)같은 비약을 하는군, 그래.
A: 자네가 원한다면 조금 더할까. 일본의 대표적인 전근대적 정치가들은 유형별로 보스형과 협객(俠客)내지 테키야형(テキャ型, racketeer type)으로 나눌 수가 있어. 양쪽 모두 정치적 정신의 차원이 독립하지 못하고 특수한 이익에 직접적으로 얽매여 있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지만, 보스형은 오히려 비교적 정상적인 소시민생활 위에 지반을 두고 오로지 일상적 경험을 통해서 ‘은근하게’ 행동하는 데 대해서, 후자의 유형은 이른반 반(反)사회화 집단이라는 이상한 생활환경을 지반으로 하여 마치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에서 구별되지. 그렇다면 그야말로 보스형은 이른바 사소설가고, 협객형은 육체문학파라는 식으로 되지 않을는지. 게다가 육체문학의 ‘이상함’이 결국 사소설적인 일상성과 같은 차원 위에 입각해 있으며, 다만 그 ‘치부’(恥部)를 불균형적으로 확대한 데 지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협객형의 지반인 반(反)사회적 집단이라는 것도 결코 우리의 생활적 기반과 질적으로 다른 원천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사회 자체의 치부인 가족제도의 희극화가 아닐까.
B: 대충 그 정도로 해두게나. 계속 떠들어대서 국회의원과 유행작가들이 같이 화를 내면서 한꺼번에 몰려오면 그것 참 곤란한지 않겠나. 그러나 어쨌거나 ‘육체’문학과 ‘육체’정치 그 모두를 어떻게 해서든 통제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문화국가도 말할 수 없게 될거야.
A: 어떻게 해서든 통제해야 한다고 했는데 대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겠어. 육체문학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육체정치 쪽은 자네 자신의 문제가 아닌가. 실컷 떠들어놓고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좀 뭣하네만, 자네도 시골에서 나 같은 사람을 상대로 열심히 떠들 여가가 있다면, 조금 더 넓게 천하를 향해서, 그리고 애오라지 요즘 같은 때에 인텔리겐치아들을 결집시키는 데 노력해보는 것이 어떤가. 자네가 그렇게 득의만만해하는 근대정신적 주체성을 크게 발휘해서 말야.
B: 마침내 최후의 역습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군. 그래, 정말 그렇게 말하면 뭐라고 한 마디도 할 수가 없네 그려. 다만 그 인텔리겐치아의 결집이라는 것, 그것을 열심히 떠들어대서 다양한 모임 같은 것도 해보지만, 역시 그렇게 효과가 오르지 않아. 어째서 오르지 않을까. 물론 인텔리 자신의 겁많고 나약함이나 무관심 같은 것도 작용했겠지. 그렇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아. 그것이 말야, 오늘 이야기한, 정신의 차원의 독립성이 있는가 어떤가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으로 생각되거든. 그렇지만 그 문제에 들어가게 되면 또 길어지니까 다시 짬을 봐서 내 나름대로의 의견을 말하기로 하지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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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김석근 옮김, 한길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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