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문학에서 육체정치까지 1

「육체문학에서 육체정치까지」(1949년) -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A: 야, 여기는 정말 조용하구먼 그래, 일이 저절로 되겠어.


B: 그렇군, 그런데 난 여기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마치 막 기름을 넣은 기계처럼 그렇게 능률이 오르지는 않지만 말야. 그래도 토오쿄오처럼 언제 어느 때고 방문객이 찾아와 시간이 끊겨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움찔움찔하지 않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A: 겨우 한숨 내려놓고 있는데 내가 불쑥 찾아왔다는 그런 말인가.


B: 아니, 인간이란 원래 제멋대로인 동물이라서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도리어 누군가 불시에 찾아와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그런 기분마저 들더군.


A: 이 집은 때때로 작가 같은 사람들이 뭔가 중요한 것을 쓰기 위해 찾아오는 것 같더군.


B: 응, 얼마 전에도 왜 있잖아, 그 상해(傷害)사건을 일으킨 T씨, 그 사람이 묵고 간 것 같아. 그런데 여기서 또 아도름(Adorm)인가 뭔가를 대량 먹고 큰 소동을 빚었던 것 같아. 같이 왔던 S씨가 토오쿄오까지 데리고 갔는데, 도중에 기차에서도 한바탕 낭자한 소동을 빚어 무척이나 고생한 것 같더구먼.


A: 와아, 이런 산 속에서까지 와서 난폭하게 군 것은 정말 대단하군. 이제 아주 중독이 되어버렸군, 그래.


B: 약이 효력을 미치고 있으면 환시나 환청으로 인해, 다자이 오사무부터 전기요금 받으러 오는 사람까지 등장해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으니까. 어쨌거나 정말 심하다고 봐야겠지.


A: 요즈음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 히로뽕 환자와 아도름 환자가 속출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나처럼 아무런 맛도 멋도 없는 밋밋한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처럼 제멋대로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 문학 같은 것을 쓸 수 없는 것인지 말야. 인간의 정상적인 생리적 기능을 그렇게까지 파괴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일은, 그 자체의 존재이유를 한 번 심각하게 문제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 자네 같은 사람은, 그래도 우리가 보기에는 대체로 그런 부류에 가까우니까, 좀더 동정적으로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군, 그래.


B: 아니, 내 전공이라는 것도, 대체로 살풍경한 점에서는 자네가 하는 일에 비해서 그렇게 못하지 않다구. 오히려 나는 자네가 가진 그런 의문이 일반 사회인들로부터 점점 더 많이 문학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던져지는 쪽이 좋다고 생각해. 왠지 사회에서는 처음부터 문학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특별한 인종쯤으로 여기고 있는 그런 부분이 있어서, 그것이 한편으로는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역작용을 해서 그처럼 비정상적인 생활태도를 취하곤 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해. 물론 문학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천차만별이어서, 모두 히로뽕 환자로 같은 식으로 취급해 버린다면 그것은 정말 너무 심한 일이겠지. 그러나 적어도 일본의 경우, 보통의 시민적인 생활 환경 속에서는 창작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그런 사정은 있는 것 같아.


A: 그런 외적인 조건이라는 문제도 물론 있겠지. 그러나 그런 반면에 우리의 보통의 사회생활, 이른바 상식적인 시민생활 자체 속에서 소재를 찾으려 하지 않고, 기꺼이 특수한 환경이나 이상한 케이스를 깊이 파고드는 그런 마음가짐이 이른바 선험적으로 생겨나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신의 생활 자체 속에서 비정상적인 ‘실험’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몰라.

나는 얼마 전에도 어떤 잡지의 소설 특집을 다 읽고서 무척이나 놀랐는데, 그것은 7편인가 8편인가의 작품 전체에 여자와 자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야. 이렇게 되면 이른바 육체문학 같은 카테고리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되어버리지 않겠어. 물론 나 자신 그런 장면을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것만으로 속이 언짢아지는 그런 청교도는 결코 아니며, 또 같이 자는 장면을 묘사했다고 해서 비정상적이라는 것도 물론 아니야. 그러나 그들 누구나 다 당당한 순수문학작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모두 한결같이 일사불란하게 남녀가 동침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는 데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네. 이렇게 말하면, 흔히 그것은 전후(戰後)의 성생활의 현실 자체가 제멋대로여서 문학은 다만 그것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는 식으로 반박할는지도 모르겠네만, 과연 현재 사회의 한 국면만을 취하면 그럴는지도 모르겠지만, 국민이 전체적으로 그처럼 성적으로 흐리멍덩해졌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어. 하물며 육체문학이라 이름붙여져 있는 것에 그려지고 있는 그런 방자하고 엉망진창인 행동거지가 대체, 국민의 일상생활과 어느정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후세의 역사가들이 혹시 그런 소설을 보고 그것을 전후 일본의 상당히 일반적인 현실이라 간주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지는 않은가. 그렇고 그런 잡지만의 일이 아니니까. 적어도 앞에서 말한 그 소설 특집호를 몇 십 년이나 몇 백 년 후에 읽는 사람들이 1949년경의 일본인은 언제나 성교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큰 무리는 아닐 것 같더구먼.


B: 설마 그러기까지야 하겠어. 대체로 육체문학이나 치정(癡情)문학이라는 것은, 쓰는 사람도 그것이 보통의 시민생활의 일상적인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쓰고, 또 읽는 사람 쪽에서도 오히려 거기에 묘사되어 있는 환경이 자신의 현실 생활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도리어 그렇게 끌리는 것이 아닐까. 역시 일종의 ‘동경(憧憬)’같은 것이겠지.


A: 조금 더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이라는 것이, 너무 메말라 있어서 시도 꿈도 없으니까, 그것으로는 소재가 되지 않는 것이겠지. 그러니까 물질적인 여유가 너무 없는 거지.


B: 그것은 물론 사회적인 문제로서 작가의 지향이나 능력만으로 치부해 버릴 것은 아닐세.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물질적인 조건이 갖추어지면 자동적으로 우리의 생활이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근처에 실제 사례들이 얼마든지 널려 있어. 생활 속에서 ‘시’를 만들어가기 위한 정신의 주체적인 작용이 없다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마찬가지일걸세. 흔히 일본인은 사교를 모른다는 식으로 외국인들이 비평을 하곤 하는데, 사교적 정신이라는 것은 모여서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춤을 추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상호간의 대화를 가능한 보편성이 있고, 나아가 풍요로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마음가짐을 각자가 끊임없이 지니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는 유럽의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아무리 하층사회라 하더라도 ‘사교’가 있어. 얼마 전에 장 콕토(Jean Cocteau)의 영화 「무서운 부모」(Les Parents Terribles)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아버지와 자식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말들이 실로 사소한 문답까지 하나하나 팔팔한 생기를 띠고 있는 것에 완전히 압도되어버렸어. 프랑스어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면, 한층 더 멋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어. 영화의 대사니까 실제와는 다르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일본의 극이나 영화에 나오는 가정에서의 대화에 그 정도의 정신의 치열함을 어디 느낄 수 있느냐 말이야. 결국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그들과 우리 사이의 정신생활의 격차로 귀착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거기서는 일상적인 시민생활 그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작품’이며, 소재 자체가 이미 형상화되어 있지 않은가. 바로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일본의 작가는 자연히 보통의 시민생활과 유리된 특수한 환경이나 이상한 사건 속에서 소재를 구한다는 식으로 되겠지.


A: 그러면 무엇보다도 일본의 전통적인, 이른바 사소설(私小說)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좋겠나. 자네가 지금 말한 것과도 연결될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또 그런 반면에 소시민적 생활의 일상적 경험에 고착되어 있다는 의미에서는 ‘노가미(野上)문학’이나 전쟁문학과 같은 비정상적인 환경을 뒤쫓아가는 경향과는 그야말로 정반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B: 나는 사상적 지반에서 본 한도 내에서 그런 두 경향이 그렇게 근본적으로 다른 범주에 들어간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우선, 우리가 비정상이라든가 정상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기껏해야 소재의 ‘장(場)’과 테크닉이 다소 다를 뿐이고, 감광판(感光板)으로서의 작가의 정신구조 자체는 대체로 비슷비슷하다고 한다면 조금 지나친 말일까. 육체문학이나 전쟁문학이 일상적인 시민적 환경과 유리되어 있는 곳에서는, 특별히 그것은 사소설적인 일상성과 차원이 다르지 않으며, 다만 우리의 감각경험 속의 가장 저열한 계기를 양적으로 턱없이 확대했을 뿐이라구. 그런 상상력은 자유분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무릇 평범한 세계를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야. 같은 이상스러움에 대한 관심이라 하더라도 유럽문학이나 러이사문학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일상적 경험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는 악마적인(damonisch) 것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육체적인 욕망이라면 육체적 욕망을 다루더라도 읽은 인상이 일본의 소설과 전혀 다른 것은 단순히 소재를 처리하는 테크닉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들은 바에 의하면 그쪽에서는 포르노그라피라는 종류의 그것은 작자도 문학자와는 완전히 구별된 그 분야의 ‘전문가’가 있으며, 사회적 상식으로도 예술작품과는 별개의 것으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일본에서는 멀리 타메나가 슌스이(爲永春水)에서 나아기 카후우(永井荷風)선생에 이르기까지 그 언저리의 한계가 애매모호하게 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뒤집어서 말하면 포르노그라피에 관한 한, 일본 쪽이 훨씬 더 ‘예술적’이라는 식으로 되겠지. 우키요에(浮世繪)같은 것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러니 문제는 테크닉의 한층 더 배후에 있는 그 무언가의 차이에 있는 것이지.

그런 의미에서, 사소설이 지금까지 도달한 예술성의 정도를 무시하고, 오늘날의 ‘육체문학’과 일률적적으로 논하는 것은 얼핏보면 난폭한 것 같지만 감성적ㆍ자연적 소여(所與)에 작가의 정신이 마치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상상력의 참으로 자유로운 비상(飛翔)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육체’문학이지.


A: 이거 참 큰일 났군 그래. 그렇게 말하면 나 같은 사람은 예를 들면 시가 나오야(志賀直哉)처럼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사소설 같은 것도, 소설로서는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지만, 누구나 대단하다 굉장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어서, 자네만큼 심장이 강하지 않은 관계상, 그런 말을 듣게 되면 그저 웃기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면서도 정직한 인상을 그저 안으로 갈무리하곤 할 뿐이지. 그렇지만 그런 묘사가 바로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는지. 자네는 뭐랄까 정신의 차원이라든가 상상력 같은 관념적인 것을 말하고 있지만 말야ㆍㆍㆍ.


B: 물론 상상력이라는 것도 존재적 기반(existential basis)이 있지. 즉물성(卽物性)을 무시하고 마치 날개를 달고 신선처럼 노니는 것만이 상상력이라면. 정신병원에 가면 무엇보다도 고도의 예술이나 학문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지. 그러나 지금 새삼스럽게 그런 것을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리얼리즘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하나의 창작 방법일 뿐, 감상적 대상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을 그대로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인간정신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서, 현실이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매개된 현실(mediated reality)로서 나타날 때 비로소 그것을 ‘작품(fiction)'이라고 하지. 그러므로 역시 결정적인 것은 정신의 통합력에 있어. 그런데 일본처럼 정신이 감성적 자연-자연이라는 것은 물론 인간의 신체도 포함해서 하는 말하는 것이지만-으로부터 분화ㆍ독립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그만큼 정신의 매개하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픽션 그 차제의 내면적 통일성을 가지지 못하고, 개개의 산발적인 감각적 경험에 끌려들어가게 되는 결과가 되지. 독자는 또 독자대로 픽션을 픽션으로 즐길 수 없기 때문에 배후의 모델 탐색이 언제나 떠들썩한 문제가 되곤 하지. 만들어낸 것에 어쩐지 불안함을 느끼는 기분이 결국 범람하는 ‘실화’저널리즘을 지탱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야말로 일본적 리얼리즘의 극치일세.


A: 이거 자네가 떠들어대는 것은 마치 지난날 공습 때에 종종 보곤했던 그 소이탄(燒夷彈)처럼,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 마구 튀어가곤 해서 갈피를 못잡겠어. 대략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지만, 그런데, 자네가 지금 말한 정신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같은 것은 납득할 수가 없어.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정신 같은 것이 과연 현실에는 없을까.


B: 내가 정신적 차원의 독립이라든가 감성적 자연으로부터의 분리를 열심히 떠들어대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능적인 독립성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지. 무슨 정신이 실체로서 자연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어떤가 하는 형이상학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닐세. 오히려 이 나라에서는 정신이나 가치라고 하면, 곧 실체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정신의 독립과 같은 말을 듣는 것만으로 어깨를 으쓱 치켜대는 ‘유물론자’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허무나 절망과 같은 것을 말하면서 ‘정신’을 ‘사물’(thing)처럼 가지고 노는 ‘실존주의자’가 배출되는 거겠지.


A: 자네 오늘 또 정신없이 좌충우돌하고 있구먼, 그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 아냐. 하여간 다시 우리 얘기로 돌아가서 픽션 속에 있는 것을 불안해 하면서, 그것을 직접적인 감각적 현실 쪽으로 밀고나가려는 일본인의 태도말인데, 혹은 그것을 다시 자네의 말로 일반화시켜서 정신이 자연으로부터 기능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해도 좋네. 그것은 역시 흔히 그렇듯이, 일본사회의 봉건적 성격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겠지.


B: 솔직히 봉건적이라는 말은 요즈음 ‘일본’에서 습관처럼 쓰이는 말이 되어버려서,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 이미 실체가 해명되어버리는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적어도 그런 정신을 길러낸 사회적 기반이 근대 이전의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한 것 같아.


A: 그럼 그 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그래.


B: 글쎄, 뭐라고 해야 할지. 그것은 그야말로 거대한 문제지. 조금 본격적으로 말하자면, 먼저 근대시민사회의 형성과정을 일반적으로 서술하고, 이어서 일본의 특수한 역사적 기반으로서의 천황제와 가족제도에 대해서 언급해야 하는 거대한 작업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군, 그리고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을 여기서 간단하게 요약하게 되면, 그야말로 기껏해야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 있는 공식론이 튀어나오기 십상이지.


A: 나 역시도 둘이서 얘기하다가 갑자기 그런 거창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것이 아닐세. 다만 자네가 전공이 아닌 문학론에 대해서도 그냥 용감해져서는 닥치는 대로 휘둘렀던 탓에, 더구나 문제가 조금은 전공에 가까이 가길래, 또다시 억병(臆病)이 도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네. 흔히 자신의 전공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지만, 전공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 학자라는 식으로 말하곤 하지. 나는 다만, 위에서 말한 것 같은 일본인의 정신구조가 오늘날 일본의 정치가 움직여가는 방식과 무슨 관련성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 것뿐일세.


B: 이거 참 다시 한 번 역습을 당했구먼 그래. 그러면 그런 정치의 문제를 논하는 최소한의 전제로서라는 조건을 붙여서, 그것도 사상사에만 한정시켜 초특급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가기로 하지. 우선, 어째서 비근대적 사회의식이 ‘픽션’위에서 불안을 느끼는가. 거꾸로 말하면 어째서 비근대적 사회의식이 ‘픽션’의 가치와 효용을 믿고, 그것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정신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일세. 그것도 풀어놓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까 도식적으로 말하지. 픽션이라는 것은 사전을 한 번 찾아봐. 라틴어의 fictio에서 나왔으며, 원래 형태를 만든다(to fashion)든가, 발명해낸다(to invent)는 그런 의미인데, 그것이 바뀌어서 상상한다(to imagine)든가 겉을 꾸민다(to pretend)든가 하는 의미가 되었다고 씌어져 있어. 즉 본래는 널리 인간이 어떤 목적이나 아이디어 위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했던 것이지. 그래서 ‘픽션’을 믿는 정신의 근저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지성적인 제작 활동에, 따라서 또 그 결과로서의 제작물에 대해서 자연적 실재보다도 높은 가치평가를 해가는 태도라고 할 수 있겠지. 제작이라는 것은 소재를 어떤 아이디어에 따라서 가공해가는 것이므로, 제작과정을 소재측에서 본다면 ‘질량’이 ‘형상’으로 되는 과정이며, 제작 주체 측에서 말한다면 ‘질량’을 ‘형상’으로 만드는 과정이지. 그러므로 같은 제작물이라도 질량성이 짙을수록 ‘픽션’으로서의 성격도 강해지게 되지. 자연적ㆍ감각적 실재성을 완전히 가지지 못하고 오로지 인간이 어떤 목적의식에 쫓아서 순관념적으로 고안해낸 것이 가장 픽션다운 픽션이며, 거기서부터 의제(擬制)자본(fictious capital)이라고 할 경우의 ‘의제’나 ‘허구’라는 의미가 나오게 되는 것이지.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은 ‘현실에 없는 것’이라는 것이므로 마침내는 픽션에는 허위(falsehood)라는 나쁜 의미조차 띠게 되었는데, 허위라든가 현실(fact)이라든가 하는 것이 자연적ㆍ직접적 소여(所與)로부터의 거리의 정도를 의미한다고 한다면, 오히려 근대정신은 허위를 현실보다 더 존중하는 정신이라고 해도 좋겠지. 실은 그것이 바로 매개된 현실을 직접성에서의 현실보다 더 고도의 것이라 보는 정신인데ㆍㆍ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