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음과 죽음에 대하여
군산대 강의에서 외국인 학생들과 <<웰컴 투 동막골>>을 시간 관계상 삼분지 이쯤 함께 봤다. 영화에 그려진 시골 공동체에서 인상적인 것 하나는 노인의 존재다. 촌장의 노모. 초가집에 다 함께 산다. 미국 갔다오니 군산 뿐만 아니라 여기 저기에 노인 요양원이 새로 많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뿐이랴. 이미 그 전부터 장례식을 전담하는 병원이나 장례식장 전용 건물들이 늘어나는 것을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봐왔다. 나는 어중간한 세대로 옛 시골에서 어떻게 어른들을 모시고 어떻게 장례를 치르는지를 어렸을적 보고 자란 세대다. 마당에 흰 장막을 친 시골집 장례식장은 이게 초상집인지 잔치집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내 부모의 늙음을, 엄마 피부의 검버섯같은 것을, 곁에서 지켜 보노라니 어떻게 모실까, 지금의 내 처지와 함께 여러 생각이 든다. 난 가능하면 그런데로 보내드리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물론 그런 이들의 사정이 있을테고 난 절대 그들 모두를 분별없이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집 근처 조그만 밭--임자 없는 땅이라서--에서 아버지는 채소 같은 것을 심으시고 엄마는 우리들 장가 보내면, 아님 막내 장가라도 들면, 시골로 가서 살까 지나가는 말로 말씀하신다. 나는 좋다고 얘기한다. 쿳시의 소설 Disgrace에서 주인공은 안락사되는 개들과 마지막을 함께 하는 의식을 치룬다. 죽음에 대한 예의랄까. 마땅히 인간에겐 더 말해 무엇하랴. 한편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법정스님의 다큐멘터리에서 본 건데, 어떤 이에게 했다는 말로, 중으로서 가장 멋진 죽음은 때를 알고 아무도 모르는 숲 속 깊이 들어가 자리에 누워 낙엽을 끌어모아 덮고 죽는, 풍장 같은 것. 헤세의 <<지와 사랑>>에 나오는 골드문트의 죽음도 그 비슷한 것이었다. 골드문트가 부럽지는 않았다. 스스로 고독을 완성하는..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다시 시골로 돌아갈 수 있을까-그런 잡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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