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해질 무렵>> 을 읽고

가끔 드는 생각으로, 작가마다 창작의 전성기가 있고 그 시기가 지나면 그 때 만큼의 에너지랄까, 치열함이 이 후에 내놓는 작품엔 덜해지는게 아닐까 한다. 모짜르트와 지미 헨드릭스는 자기가 할 만큼의 에너지와 열정이 담긴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총총히 사라져갔다. 더 살았다면 더 나은 작품을 세상에 선보였을까, 아니면 더 실망스러운 것 이었을까? 운명의 소관인가? 또 칸트나 베토벤,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사상가, 작가는 비교적 길게 살아서 빛을 보았고, 그래서 자기가 할 만큼의 작품을 세상에 보여주고 갔다고 생각한다. 수작과 태작의 분계점을 자세히 논할 능력은 없다. 그저 느낌이다. 어쩌다 황석영의 최근 소설을 읽고 이런 생각을 한 번 더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더 넓어진 것도 있지만 또 한편으론 점잖아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예전, 그러니까 감옥 가기 전의 작품들이 더 좋다. 내가 마흔 초반의 나이임에도 말년의 소회를 작품에 표현하거나 고백하는 작가들의 글을 최근에 좀 읽어서인지, 원래 그런 회한remorse에 가까운 생각이 드는 게 그 나이엔 당연한 건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조금 묘하긴 하다.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라 한다. 거기엔 지금의 청년 세대의 가난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기도 하다. 제대로 사랑을 하지 못하거나 못했던, 또 그렇게 표현할 수 없거나 없었던 비슷한 두 처지의 소위 "흙수저"들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 기성 세대인 주인공 '박민우'의 건축 설계사로의 '운좋은 성공'은 필시 누군가들의 희생없이는 불가능했고 그의 계급적 안도감은 폐쇄 본능으로 이어진다. 다음 세대의 불안과 절망은 다른 민우인 "김민우"의 자살로 대변된다. 그를 알았던 편의점 알바녀이자 연극 연출가인 "정우회"가 전체 서사의 연결 고리이긴 하지만 고생하는 것 말고 뭔가 통찰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 퍽이나 밋밋하다. 그런 사실적 측면에선 젊은 세대 작가군들에게 읽어내야 할 게 더 많을 것이다.


"내가 녀석을 보면서 느낀 것은 요샛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면 어지간해서는 뭘 하든 한다는 것이다. 무턱대고 개판치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길에서 크게 밀려나지 않는다. 나로서는 형편없는 산동네의 가난을 벗어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그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의 내면은 좀더 복잡할 수밖에 없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갈등을 달래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사실 사방에 널려 있는 게 나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던가. 밤에 도심지 호텔의 전망 좋은 라운지에서 고층 아파트와 붉은 십자가와 상가 건물들의 불빛으로 가득한 거리를 내려다보면 그들이 보인다. 억압과 폭력으로 유지된 군사독재의 시기에 우리는 저 교회들에서, 혹은 백화점의 사치품을 소유하게 되는 것에서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온갖 미디어가 끊임없이 쏟아낸 '힘에 의한 정의'에 기대어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너의 선택이 옳았다고 끊임없이 위무해주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여러 장치와 인물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도 그런 것들 속에서 가까스로 안도하고 있던 하나의 작은 부속품이었다." (14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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