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서경식 김상봉 대담
김상봉 선생의 예술론에 대해서 좀 갑갑한 느낌이 든다. 약간 이념적이다. 예술 행위 자체의 자율성, 우발성, 놀이적 특성도 함께 생각해야 하지 않을런지. 대화체 문장임에도 조금 도식적인 설명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보편 가능성에 대해선 나와 비슷한 고민이 보이지만... '만남'의 가능성이 오직 슬픔과 수난의 경험, 그리고 자기 성찰을 통해야만 하는지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왜 기쁨과 즐거움은 말하지 않는가? 서경식 선생의 말에는 루시디와 사이드의 모습들, 경계인으로서의 고민이 많이 겹친다. 교양을 강조할 때 이해가 가면서도 아슬아슬하단 느낌이 들고. 둘 다 유토피아로서의 외부, 희망, 즉 초월성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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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어 공동체의 다수자들에게도 그런 비판적 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의 제일 밑바닥에 놓여 있는 모어, 그 모어라는 것조차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자각이 필요해요. 저는 다수자가 무심코 넘기는 것들조차 특정한 역사적, 정치적 과정의 산물이라고 인식할 수 있고 그런 비판적 사유의 계기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바로 디아스포라라고 생각해요."
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결국, 오늘 여기에 조선말을 쓰는 김상봉하고 조선어를 잘 몰라서 일본어를 쓰는 서경식이 만나 소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단지 소통이 잘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소통해야 하면 어려워도 소통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순서는, '공통의 언어가 있고 그 바탕에서 소통하게 된다'가 아니라 '소통의 필요가 있고 그로부터 공통의 언어가 만들어져간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소통하다 보면 김상봉의 조선말도 바뀌고 저의 일본말도 바뀌게 됩니다. 그러니까 조선말에 영향받은 일본말이 되고 일본말에 영향받은 조선말이 되어가는 것이죠. 그런 피진화의 과정은 긍정적으로 봐야 합니다. " (76)
김--"실은 고통이란 같이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어떤 고통이라도 혼자 겪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번째 사실은 '고통을 같이 겪는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겁니다.감각의 차원에서 고통이 있다는 것은 개별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감히 '내가 다른 인간과 고통을 같이 겪는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이니까요.
... 어떤 정신적 공감을 통해...
어떤 고통은 우월하고 어떤 고통은 열등하다는 식의 판단이 분명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저는 동시에 고통들의 평등성, 정도 차이를 뛰어넘는 고통의 초월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열등한 고통을 겪은 자가 그보다 더 우월한 고통을 겪은 자를 이해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그들과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은 미신입니다. 모든 고통이 모노톤으로 똑같아져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고통을 신화화하는 것이죠. 우리는 분명 고통 속에서, 고통을 통해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의 차등성과 차이 속에서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성을 만나고 이해하는 것이지 '내가 너와 똑같이 진흙탕 속에 빠져 있구나'라는 식은 아닌 것이죠." (108-09)
김--"저는 한국사회에서 역사의 기억이라는 문맥이 유대인들의 경우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기억은 '저항의 기억'이에요. '억압의 기억'이 아니에요." (193)
김--"거기에는 프리모 레비, 자기가 없어요. 능동적 저항이 없는 수동적인 수난의 기억은 자기의 기억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이입을 할 수 없게 만들어요." (219)
서--"오히려 이렇게까지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걸 냉철하게 지켜보고 증언으로 써낸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이 저에게 격려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희망적인 일이 있는데도 굳이 비판적으로 말하는 건 냉소주의니까, 그것하고는 다릅니다. 저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람이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자신을 미화하지 않고, 자신의 약함을 직시하고, 기억해서 그것을 써냈다는 것이 놀라운 인간의 힘이라는 것이죠. " (222-23)
김--"진정으로 절망한다는 것은 도덕을 넘어서야 하는 겁니다. 세상에 도덕 같은 것은 없어요. 그런 점에서 도덕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입니다. 세상에 도덕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도덕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레비의 큰 특징 중에 하나가, 도덕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계몽주의적인 척도를 가지고 나치에 대해서 절망하거든요. "
"세잔이 모네를 보고 '모네가 가진 것은 눈밖에 없다. 그러니 얼마나 위대한 눈인가?'라고 했다지요? 저는 이 말이 딱 투키디데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보면서 투키디데스가 뭐라고 그럽니까? '이렇게 그해 여름은 지나가고 있었다.' 딱 한마디 합니다. 저는 그걸 볼 때마다 전율을 느낍니다. 이 사람은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아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사악하고 한편에서는 맹목적인 존재인가,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한심한 비극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일절 코멘트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게 왜 그런가? 왜 인간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 스스로 묻도록 합니다." (224-25)
김--"인간이 똑같은 고통을 겪더라도 그것이 남에 대한 격분에 머무를 때는 고통이 타인과의 만남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에 대한 슬픔으로 전환될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를 참된 만남으로 인도하는 다리가 되는 것이죠.. 하지만 어떻게 해야 똑같은 고통이 즉자적 아픔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이고 반성적인 슬픔으로 승화될 수 있겠는지가 제가 씨름하고 있는 물음입니다. 다시 말해 '보편적인 고통의 감수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슬픔의 의식이 어떻게 우리 속에서 생성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주체가 없다고 떠드는 사람들에게 '고문을 안 당해봤으니까 주체가 없다고 떠들 수 있다'고 쓴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354-55)
서--"굳이 말씀드리자면, 역시 정체성 문제와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주체성 혹은 정체성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그 믿음 안에서 이기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 믿음이 근거가 있건 없건 그건 중요하질 않지요. 그들에게 주체성이나 정체성은 이미 전제로서 주어져 있는 것이기 떄문입니다. 반성의 여지가 거의 없지요.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정체성과 주체성에 관한 물음이 제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도대체 그런 고통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또 그런 고통을 느끼는 나는 누구인지 반복해서 묻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360)
황재형 그림
<<만남: 서경식 김상봉 대담>> 돌베개,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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