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 - 사랑하는 소녀에게 바치는 감사의 인사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2003)
나 어릴 때
남들처럼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보는 것이 꿈이던 소녀가 있었다.
내가 학교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을 때
그 소녀는 전태일과 평화시장 미싱 앞에
앉아 있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그리고 가을도 지나
전태일도 평화시장을 떠나고
다시 겨울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소녀가 교복 대신
의정부행 12번 버스 안내양의 제복을 입고
버스 계단에서 졸다가
문을 여닫으며, 차가운 겨울 바람 속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타인의 꿈속에서만 숨쉬고
나 또한 너의 꿈속에서 자랐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나 지금 네가 쓰러지던 얼음바람 속으로
다시 돌아와
의정부 가는 12번 버스 계단을 오르며
남들처럼 예쁜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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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선생을 한 번 뵌 적이 있다.
내가 학술부장으로 일했던 십여 년 전이었다.
기획한 주제 강좌 원고 인쇄본을 전해 드리기 위해 종로의 문예 아카데미에 찾아갔다.
선생은 작은 키에 선한 인상으로 말씨는 퍽 겸손하셨지만 강단이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과는 제 글이나 생각이 다른 것 같네요."
민족주의와 관련, 아마도 헤겔의 이론을 적용한, "서로 주체성"이라는 개념이 주가 된 강연으로 기억한다.
강연이 끝나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에 대한 여러 다른 지휘자들의 해석을 말했다.
글이 깨끗하고 읽기 쉬우면서도 통찰력이 있다.
가끔 철학한다는 사람들의 독선적인 태도를 마주할 때 불편한 마음이 드는데, 선생은 그런 부류와 친해질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슬픔"에 대한 사유를 한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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