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물질

세미나를 끝내고 잡담을 하다가역사학과 교수가요즘 자기 과에 대학원 가려는 학생이 별로 없다는 얘길 했다.졸업을 해도 자리 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교수들 스스로 그리적극적으로 추천을 하기엔 머뭇거린다는 말도 했다. 그런 사정을 들으니자연스레 한국의 상황이비교됐다. 내가 직접 그런 소릴듣지는 못했지만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어떤 선배한테 대뜸 집에 돈 많냐고 물었다던, 지금은 은퇴한모교수가 떠오른다.당신 같은 속물은 글러먹었다고 단정지었지만, 그것도 일종의조언일 수 있고,혹은 교수 사회 현실에대한냉소적 표현일 수는 있겠단 생각이든다.그러나 길이 없으면 뜻도 없어지지 않을까?

예전길수 형이랑 자주 술먹을 때 얘기지만 형은 한 달에 60만원만 있으면 평생 공부할 수 있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대화는 설교조로 길어지기 시작한다.열악한 현실에 순응하는 자기 위안일 수도 있었다.유가 철학에서도성리학을공부하는 사람으로 조금 세상물정 모른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자신감에진정성과 진지함이 깃든 것은 분명했다. 형 스스로 안빈낙도의 삶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게바람직하고 말하지도 않았다.하지만어떤 경직된 태도가 느껴졌고,주희같은 이가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예를 들면, 그래서 형이 주희같은 사람이 되려냐고 묻고 싶기도 했다. 왜이런레퍼토리가 시작됐는지 정확한 기억은 안나는데, 내가대학원생의 불안정한 삶에조금 푸념을 했던 거 같기도 하다.또 시작했네,그러면서도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 특유의 어떤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열정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근데형같이 술 좋아하는 사람에게 60만원은 조금 박한 거 같네.

돈도 없는 사람이 퍽이나 술을 좋아해서 옷도 변변치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알코올에 니코틴 중독자 아니었나 싶다. 형의 논문주제이자 삶의 관심사였던 마음의 쓰임에 대해 요즘 여러 생각이 든다. 일이든 사람이든정성을 꾸준히 다하는 일이 쉽지 않기에 그런다. 하루에도 얼마나 나의 마음은 여러번 변하는가. 그리고 얼마나 나의 일에 충실한가, 자책 비슷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글쎄, 나보고 넌 얼마주면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선주선배 말대로 그거보단 조금 많았으면 좋겠다, 인간적으로...

지금은 프릴림 시험을 8월 혹은 9월경으로 잡고 목록을 만들어 책을 계속 읽고 있다.

한 4분의 3 가량 읽은 것 같은데 그리 진도가 빠른 편은 아니다. 작품이나 이론서를 읽는 일 모두시간이 빠듯하다. 빠듯한 줄 알면서도 조금 느슨하다는게 문제이긴 하지만. 마사 너스바움때문에 헨리 제임스의 말년 작인 [Golden Bowl]을 읽긴 했는데 쉽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타일이 그렇단 얘기다.지난 주엔 마이클 맥키언의 [영국 소설의 기원들]이란 두툼한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쓰려면 한 두해 작업으로는 어림없겠단 짐작이 들었다. 뭐,기원을 찾는 것도 내 일이지만 그 이후의 19세기 소설에 어떤 식으로, 어떻게 해서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알아야한다. (좋은 책 있으면 추천바람)푸코의 [말과 사물]을 써먹긴 할 것 같은데 문학 얘기를 직접적으로 하진 않아서 조심스레 접근할 필요가 있다. 뭐, 재현의 문제니까맞아떨어지긴 하겠지만.

가령 이런 것이다. 19세기의 서구에피스테메의 변화에서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푸코는 칸트를 지적한다. 인식의 주관적 객관성을 정립시킨 인물이므로. 그 비슷한 대비를 18세기와 19세기의 영국 소설의 리얼리즘 비교에 대입할수 있지 않겠는가. 가령조지 엘리엇의 [Adam Bede]에 나타난화자는주관화된 관점을 전경화시키지만 그것이객관성을갖는다는 것을주장한다. 지극히 칸트적이다.이런 방식은18세기의"truth"를 보여주겠다는 자신만만한 디포나메타소설적 관점을 취하면서 회의론에 빠지는 필딩의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런 비교는 마치 철학에서 데카르트와 칸트의 주체 개념이 어떻게 다른가를비교하는 것과도 같으리라.이걸 내가 건드려야 되나라는 생각에머리가 아프다.다른 한편으로 조지 엘리엇의 주관적 객관성의 관점 역시제임스에게서 비판을 받는 것으로 안다. 아직 그 아티클을 읽지 않아서뭐라 직접 말하기는 하지만.그럼 쿳시가 보는 타자와 리얼리즘의 문제를 이 연속선상에 놓는 것은 타당한가?가령소설속의 작가 코스텔로를 인터뷰하는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한다. 당신이 여성인데 어떻게 남성을 묘사할 수 있는가라고 그러자 그 작가는 그래서 자신이 소설을 쓰는 거라고 답한다. 그 비슷한 질문을 리얼리즘이라는 장르 자체에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물음이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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