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rnity and Immortality
두 단어를 번역하면 '영원'과 '불멸' 정도일 것이다.
전에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읽으며 지나쳤던 이 부분을 요즘 다시 생각하고 있다.
좀 더 최근에는 호손의 작품을 읽으면서 반복적으로, 거의 집착에 가까우리만치, 집요하게 나타나는 이 두 개념의 대조를 주목하게 된 것도 있다. 잘 알겠지만 종교적 입장에서 영원한 것, 영원성만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얻게 될 가치라면 불멸의 개념은보다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이다.(여기서 다시 조지 엘리엇이 떠오르는구나) 물론 불멸은 생물학적인 의미를 넘어선 현존재의 개별성이 그 이름으로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렌트는 서구에서 기독교의 등장으로영원성이 불멸성을 누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아마 동양의 불교적 세계관도 영원성을 염두한것이리라. "없음"의 개념이 그러하다.
불사의 몸을 얻고 싶다거나, 자신의 명예를 세상에 드높이고자 하는 인물이 있는 한편에, 지극히 청교도적인, 그러나 그 방향에서 그릇된, 세상의 업적이나 부귀, 명예를 애써 부정하는인물이 다른 한편에 등장하는 것을호손의여러 이야기에서 종종 읽을 수 있다. 영원한 것이나 불멸한 것 모두 우리의 감각적 인지 밖에 있으므로 어쩔 수없이 관념적인 특성을 갖을 터이다. 그래서이데올로기화될 가능성이 많다.종교적 광기나세속적 공동체의 이념모두 사람의 심성을왜곡시키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호손 스스로가 신앙심이 깊은 개신교도였다고 하지만그가 청교도였던 자신의 조상이저지른 만행을 깊이 뉘우치는 작가임을 우리는 안다. 나는 이 "eternal"과 "immortal"의 대비가 그의 소설에서 갖는 뜻을 살피면서, 그 영원성과 불명성에 대한추구가 각기 이데올로기화되고,극단적인 모습으로나타날때 어떠한 불행이 일어나는가를 호손이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페이퍼는 변변치 못한 글쓰기로 Dr. Berthold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그러나나의 생각과 글을 평가받는 차원을떠나,이 영원과 불멸의 대조가 나의 실존적 문제와 결부된다고 여겨졌다.그것은무엇보다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나를 비우지 못하고서 어떻게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만약 불행한 처지에서 종교가 위안을 준다면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 불행이 지속되어니체가 말한 약자의 원한감정 같은 것이 생긴다면 나는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내가 뭐가 되려고 이런길에 들어서고 유학까지 오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그리고 한 구석 찜찜하게 남아있는 인정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따지다보니 하필 왜 영문학을 하게 되어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의아한, 어떤 운명적인 감정마저 느낀다.
니체 역시글을썼으므로 불멸의 꿈을 간직한 사람이었다.그를 만족시키는 세상의 인정이 없다면그의 삶도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니까그의 불멸성은지금까지는 유효하다. 다만 불행한 의식의 지속이 한 개인의 실존을 위해 얼마만큼 필요한 것인지모르겠다."거기에 있음"의 나라는 존재가 처할 곳은 이 세계이다. 그러나 다시내가 종교인이라는 인식으로 되돌아오면, 신의 섭리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이두 개념의 긴장관계가 아직도내겐화두인 듯 싶다. 한가지만 더 말하면, 내겐 건강한 의식을 가진비종교인이 불행한 의식을 가진 종교인보다 더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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