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엉이'에 해당되는 글 135건

  1. 2012.11.26 이창호와 나
  2. 2012.11.16 야곱과 백합
  3. 2012.08.20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4. 2012.08.19 [김우창칼럼] 오늘의 정치와 인간의 공간

이창호와 나

이창호와 나는 75년생 토끼띠, 동갑이다. 고향도 비슷하다. 전주와 군산. 20여년 넘게 한국 바둑을 이끈 그가 지금은 이세돌이나 박정환 같은 후배들에게 밀려 예전만 같지 못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바둑을 여전히 좋아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인연이 닿아 친구가 되면 더 좋겠지. 어느 바둑 매체에서 손종수라는 분이 이창호의 말을 다듬어서 쓴 글을 읽게 됐다. [부득탐승]이라는 책이 나왔다던데 읽어보고 싶다. "재능이란 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자라는 나무다." 무척 공감한다. 홀로 있던 내가 동생들을 여기서 보니 얼마나 반갑고 위안이 되던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틀 전,여기 추수감사절 날에 바타차라야와 그리핀 선생이 집으로 초대를 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둘이 연인인데, 내 논문 심사위원들이기도 하다. 바타차라야 선생의 호의는 항상 고맙다. 깐깐해 보였던 그리핀 교수가 맥주를 건네고 손수 고기를 썰고 자신의 옛날 일들을 스스럼 없이 말하는 모습들이 또한 기억에 남는다. 사무엘 존슨과 헨리 제임스와  self-reflection이라....아우어바흐의 예도 재밌었다.     

 

 

 

_________<http://www.cyberoro.com/news/news_view.oro?div_no=11&num=515635&cur_page=&cmt_n=0>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개의 사람들은 천재의 재능을 먼저 발견하지 못한다. 다만 그 행위의 비범한 결과를 보고 비로소 천재라고 부를 뿐이다. 따라서 천재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린다면, 다음과 같은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모든 아이들을 천재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다. 문제가 있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오래 생각할 뿐이다.”

아이에게 성급하게 무엇을 하라거나 무엇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던 부모님. 부모님은 그것이 아이를 위하는 일이라기보다 부모의 욕심과 집착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아이의 미래를 좌우할 재능은 어느 곳에 감춰져 있다가 언제 돌발적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가능하면 아이가 스스로 최선의 재능을 찾을 수 있도록, 많은 것을 경험하고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좋다. 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가족이 나를 늘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일이다. 재능이란 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자라는 나무다

재능을 가진 상대를 넘어서는 방법은 노력뿐이다. 더 많이 집중하고 더 많이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바둑에는 ‘복기’라는 훌륭한 교사가 있다.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준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스승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까운 사람과 한의원을 찾았다가 대기실에서 집어든 ‘포브스코리아’에 선생님의 인터뷰가 게재돼 있었는데, 거기 스승의 훈육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제 스승이신 세고에 선생님의 정신세계는 일반인과 차원이 달랐어요. 도인에 가까우셨어요. 저에게도 프로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하셨죠. 바둑을 계속 두면서 ‘인간됨’을 강조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스승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보여주셨어요. 선생님께선 ‘제자가 가는 길을 터주는 것이 스승이다’라고 하셨어요. 한국에 와서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였을 때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꼭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모든 ‘느림’은 절대적인 느림이 아니다. 빠르게, 좀더 빠르게 질주하는 현대생활의 모든 사고방식에 대한 상대적 느림이다. 상대적 느림은 ‘감속(減速)’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바둑의 속도는 외형으로 드러나는 행마의 속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 감춰진 인식의 속도, 판단의 속도가 중요하다. 몸에 맞는 옷과 같은 것, 바로 적정의 속도가 핵심이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균형’이다.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더구나 프로라면 누구나 ‘자만이 곧 패착’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때때로 함정이 된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자만에도 단계가 있다. 스스로 교만한 줄 모르는 것이 자만의 포석이고, 아예 겸손한 척하는 것이 자만의 중반이며, 심지어 자신이 겸손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자만의 끝내기다. 그것이 내가 30년 가까이 반상을 마주하며 수없이 많은 실전에 임하면서 비로소 깨닫고, 가장 경계했던 부분이다.

순류(順流)에 역류(逆流)를 일으킬 때 즉각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다. 거기에 휘말리면 나를 잃고 상대의 흐름에 이끌려 순식간에 국면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바둑만큼 ‘상대적’이라는 의미가 잘 드러나는 게임도 없다.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다. 그러니 나의 흐름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는 자세야말로 최고의 방어수단이자 공격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중요한 승부에서 패하고도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 사람은 이미 프로가 아니다. 그것은 인품과 무관하다. 승부사에게 패배의 아픔은 항상 생생한 날것이어야 한다. 늘 승자가 될 수는 없지만 패자의 역할에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

위험한 곳을 과감하게 뛰어드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다. 뛰어들고 싶은 유혹이 강렬한 곳을 외면하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것도 용기다. 이럴 때 승부의 포인트는 누가 먼저 인내를 깨뜨리느냐에 있다.

재기발랄한 신세대들의 도전이 갖는 열정과 패기의 에너지는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선행자들에 대한 존중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어제가 없었으면 우리의 오늘도 없다.
나도 이제 기성세대가 되어 잔소리를 입에 담을 나이가 된 것일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겸손과 자존심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꺾이지 않는 단단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만이 진심으로 겸손할 수 있다.

바둑교실의 문을 기웃거리는 수많은 보통 어린이들에게 ‘설렘 가득한 너의 그 얼굴이 20여 년 전 나의 얼굴이며 노력을 이기는 재능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우엉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Prayer for the First Day of Class by Dr. James Arnt Aune  (0) 2013.01.28
fall class of 2012  (0) 2012.12.11
야곱과 백합  (0) 2012.11.16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0) 2012.08.20
[김우창칼럼] 오늘의 정치와 인간의 공간  (0) 2012.08.19

야곱과 백합

#1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서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창세기 28: 10-12)

 

성경에서 애착이 가는 인물을 꼽으라면 우선 먼저 야곱을 대겠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 중 밤하늘을 보면 떠오르는 어떤 생각의 연상때문이다. 형인 에서의 분노를 피해 도망가던 중 광야에서 밤을 보내면서 꿈을 꾸는 장면은 어린 시절 나의 상상력을 무척이나 고무시켰다. 밤과 별과 하늘, 그리고 들판. 함께 떠오르는 것은 외갓집에서 엄마와 함께 보던 은하수. 

 

 

#2

그러므로 내거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태복음 7: 25-29)  

 

백합의 고결함과 아름다움, 반 친구 어머니가 선물한 공책의 표지에 너무나도 선명했던 백합 꽃, 자유. 내가 좋아하는 예수의 메시지

 

'우엉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fall class of 2012  (0) 2012.12.11
이창호와 나  (0) 2012.11.26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0) 2012.08.20
[김우창칼럼] 오늘의 정치와 인간의 공간  (0) 2012.08.19
종교 좌담  (0) 2012.08.19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처음 본 라인 폭포의 모습이 인상 깊었던지 여기 폭포의 감흥은 내게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이긴 하지만.

동생은 그랜드 캐년에 못가서 안달이다. 거기도 마찬가지 일텐데...뭐, 처음엔 다 그렇겠지.

아홉시간 넘는 기차 여행에 책을 보며 가니 그리 지치지는 않았지만 올 때는 조금 피곤했다. 

그래도 좋은 충전이었다.

다시 수업 준비도 해야 되고, 선배가 부탁한 일도 있고, 아마존으로 주문한 것도 받아야고 해서, 얼른 칼촌으로 갔으면 좋겠다.

근데 이눔은 또 보스턴 시내로 나갔다.

 

 

 

 

'우엉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창호와 나  (0) 2012.11.26
야곱과 백합  (0) 2012.11.16
[김우창칼럼] 오늘의 정치와 인간의 공간  (0) 2012.08.19
종교 좌담  (0) 2012.08.19
백석-고야古夜  (2) 2012.07.07

[김우창칼럼] 오늘의 정치와 인간의 공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132123525&code=990100>-------------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 대통령 선거에 나서려는 여러 후보 지망자들의 정책들은 차이보다는 공유하고 있는 바가 두드러진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그것은 사회 현실에 부딪힘에 따라 또 정책을 맡는 지도자에 따라 천지의 차이로 다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두드러지는 것은 여야를 막론하고 복지사회 체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성장 과실의 보다 공정한 분배 그리고 그것을 위한 체제의 정비가 다음 정권의 과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후보자들의 견해이기도 하지만, 두루 일반화된 생각이기도 하지 않나 한다. 많은 사람에게 한국사회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들게 된 것이다. 맹렬하게 앞을 향하여 나아가다 보면, 일단 멈추고 몸을 추스르고 앞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시간을 멈추고 공간을 둘러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활력과 피로 또는 기분의 리듬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사람의 삶의 구조 속에 들어 있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이데거의 대표 저작 제목은 <존재와 시간>이다. 여기의 존재와 시간은 더 일반화하여 공간과 시간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 우주 만물의 존재에서 기본 축을 이루는 것이 공간과 시간 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거대한 물리 현상만이 아니라 사람의 삶에서도,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학교에 가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고, 계절의 리듬에 따라 농사를 짓고 또는 하루하루 일하면서 아침에 나가고 저녁에 들어오는 것-이 모든 것은 시간의 리듬 속에 움직인다. 이러한 시간의 축에 더하여, 집, 동네, 고향, 도시, 나라 또는 학교 직장 등-이러한 것들은 삶의 터전으로서의 공간을 말한다.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은 시간을 나누어 쓰는 것보다도 어려운 것이 이러한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부족하고 비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참으로 부족한 것은 진정한 공간이다. 그리하여 공간은 사람의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시간 속에 행하게 되는 사람의 일은 이 공간을 얻거나 보다 좋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는 사람에게 신비스럽게 드러나는 근원으로 생각되지만, 보통의 삶에서 느끼는 공간에 대한 향수도 이에 대한 작은 예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는 곳 어디에나 있는 것이 공간이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면 참으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은 허용되지 않는다. 계속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삶, 특히 현대 사회의 삶이다. 작업의 시간은 사람의 삶의 거의 모든 것이고, 일이 급하다보면 공간은 스쳐지나가는 시간의 부속물에 불과하다. 옛날 농업사회에서 일 하는 것은 익숙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에서 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이 삶의 신진대사 속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자신의 직장이 옛날의 토지에 비슷하게 삶의 유기적 총체의 일부가 되는 수는 많지 않다. 그것은 잘 알 필요도 없고 익숙해지지도 않는, 스쳐지나게 되는 정류장일 뿐이다. 그것은 영상물 속의 공간에 비슷하다.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저서에서 한나 아렌트는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의, 즉 전체주의의 역사철학은 과정의 철학으로서, 역사나 사회 과정을 일정한 입장에서 파악하고 그것에 따라서 사람의 삶--모든 사람의 삶을 동원할 수 있다는 철학인데, 그것은 과정에 빠져들어 존재의 경이로움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존재의 경이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전체주의만이 아니다. 모든 정치적인 동원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따라 ‘빨리 빨리’ 움직이면서 어떤 공간에도 머물지 못하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루소가 교육을 논하면서 가졌던 고민의 하나는 어린이의 오늘의 행복과 미래를 지향하는 교육의 목표를 어떻게 적절하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 또는 성공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은 공간에 체재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그리고 성공의 그래프에서 모든 공간은 시간 속에 이루어지는 소득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만을 갖는다. 그래서 집과 땅은 부동산이 된다.

여기에 대하여 자연은 예로부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연으로부터 소유와 권리를 분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심리적으로 또 자연산수의 관점에서, 옛날에는 자연을 향한 사람의 마음까지도 사회와 정치에 완전히 지배되는 것은 아니었다. 산수화가 말하여주는 것은 정치나 사회에 복무하라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공간-그에 맞설 수 있는 존재의 차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화조(花鳥)와 호접(胡蝶) 같은 자연물도 사람으로 하여금 복무의 시간으로부터 돌아갈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하였다.

사회를 공동체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생존을 뒷받침해주는 튼튼한 공간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오늘의 도시화는 공간을 물리적으로는 넓어지게 하지만, 안정된 생활의 공간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뿔뿔이가 된 사람들이 내비게이션으로 길을 찾고 인터넷으로 지인(知人)을 만들어 가는 곳이 현대적 도시 공간이다. 출세의 사다리를 찾고 그것을 올라가려는 것도 비슷하게 인위적 공간을 만들어보려는 몸부림이다. 복지제도가 튼튼해지고 사회적 유대가 공고해진다면 이 공간은 조금 더 안정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여러 외적인 복무로부터 완전히 풀어내주지는 못한다.

사회적 약자라는 말이 있다. 약자의 편을 들고 약자를 돌보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것을 설득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은 사회적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에 중요한 지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공간은 그것을 넘어간다. 돈이 없고 권력이 없으면 약자인가? 약자라는 말 자체가 시체(時體)의 가치 기준을 받아들인 것이다. 릴케의 초기 시에는 어려운 사람들의 참상을 간단히 요약하려 한 시들이 있다. 이들 시에 관계하여 그는 한 편지에서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 일이 있다. 다른 사람의 형편을 개선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상황을 잘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인 스스로가 상상해낸 인물의 속셈을 알기도 어렵거늘, 자신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타인이 이것을 알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가 자기 시에 그렸던 거지나 난쟁이는 자신의 마음에서 만들어낸 틀에 맞추어 주조(鑄造)해낸 것들이다. 이 틀의 자료는 그들의 신세를 바로잡자는 희망으로부터 추출된 것이 아니다. (물론 타자에 대한 공감이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것을 그는 인정한다.) 시인은 그러한 의도 때문이 아니라 그들만의 개체적인 운명 그것을 기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를 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기림을 위한 시적 집중이 시인으로 하여금 근본적인 진실에 이르게 한다. 두려운 것은 정상인이라는 규격에 맞추어 난쟁이의 키를 늘이고 거지를 부자가 되게 하겠다는, 새로 교정되는 세계이다-릴케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말은 보수 반동의 발언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각자에게는 정치와 사회의 틀을 넘어, 그만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난쟁이를 잡아 뽑아 규격화하려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는가? 거지가 일용할 양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거지가 되기로 결정한 사람-무소유의 수도자가 아닌가?

우리 사회는 이제 공동체적 유대의 강화 필요성에 동의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물론 여러 정책적 조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환은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편안한 공간을 만드는 일로 고쳐 생각해볼 수 있다. 이제는 앞으로 바삐 나아가는 일보다도 사람이 편할 수 있는 공간-물리적, 사회적 그리고 초월적인 공간이 사람의 사람됨을 용이하게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가 된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필요하다면, 이러한 공간의 마련에 그것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엉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곱과 백합  (0) 2012.11.16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0) 2012.08.20
종교 좌담  (0) 2012.08.19
백석-고야古夜  (2) 2012.07.07
동생을 만나다  (2) 2012.02.10
prev 1 ··· 13 14 15 16 17 18 19 ··· 34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