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말하기

내가 쿳시와 비트겐슈타인에 끌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 것truth telling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 혹은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말이나 글이 오가면서 벌어지는 오해와 왜곡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갖고 있다. 억울함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어렸을 적엔 그 때문에 운 적도 몇 번 있다. (울면 진심이 통하나?)


쿳시의 영향이겠지만 자서전이나 고백록에 대한 관심이 있다. 그의 엄격하고 세심한 관찰은 본받아야 한다. 그에겐 어떤 이의 온전한 진심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것이 하나의 도약으로 간주된다. 거기에 은총이 있다.  


신실함sincerity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어가 인간의 감정, 인상, 특히 고통과 같은 신체적 현상에 유리되는 것을, 차라리 별개의 것임을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론"은 암시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하라는 말이 비언어적 "세계" (하이데거적인) 라는 외집합을 동반한다. 거기까지 인간 세계이다. 


언어의 화용론과 별도로, 서양 철학의 이성은 곧 로고스의 세계란 흔한 말이 여기서 위태롭다.


가령, 주변의 동물을 만나면 언어는 무소용이다. (고로  혹여 있다 하더라도 외계 생명체가 우리를 알아 먹을 수 없을 건 뻔한 이치이다.) 사자의 말이 예로 나오는 것, 즉, 그것의 이해불가능성은 역으로 인간 언어의 어떤 내성을 지적하는 것과 관련있다. 


(늑대아이 혹은 야생에 버려진 아기가 인간 사회에 제대로 동화된 적이 없다 들었는데 그 때문일까)


니체가 이미 비슷하게, 그리고 훨씬 전에 장자가 그 비슷한 인간의 언어관과 진리관의 허술함을 비판하였다. 어디까지나 인간세계의 환원주의적 관점의 소산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하여 불립문자와 같은 패러독스는 적합하지 않다. 


문학의 "느낌" 그리고 그것의 위로는 누가 말한 하나의 "힘"과 같다. 즉 움직이게 만든다. 언어 너머의 무엇을 손짓하는가.


음악이라는 공기의 파동은 어떠한 언어이고, 음악의 감동은, 곧 느껴서 움직임은 -- 인간을 너머 동식물에게 이르기까지--왜 일어나는가. 그 조응은 어떠한 원리에서 발생하는가.


진실이란 결국 인간이 살기 위해 있는 것 아닐까. 언어란 그래서 그렇게 있는 것인가. 바람과 풀과 대지, 그 움직임, 그리고 시적 언어. 김수영과 왈라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는 함께 비교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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