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을 뛰는 기분

공부하는 일 외에 가르치는 일이 이번 학기에 시작됐다.

그래서 쑥스럽지만애들한테서 받아보는 에세이 앞장에professor Ryu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오홋,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더군. 매주 월, 수, 금 한 시간씩 1,2 학년을 상대로 [작문과 수사학]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는데, 그 한 시간 강의에 이래저래 신경이 많이 쓰인다. 마찬가지로 이 곳에서작문 수업에 쏟아붇는 학교 측의 노력도 상당하다. 뭘 이렇게 여러가지로 세심하게 챙기려는지 조금 피곤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행히 파워포인트로 만든 기존 자료가 있어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일 뿐, 나도 조금 여러 궁리를 보탠다. 어차피 수업은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거니까. 그래서 가끔 전에 읽은 자료들을 끌어 온다.지난 시간엔 논리적 오류에 관한 여러 개념중 '성급한 일반화'의 예로러셀의 칠면조 일화를 읽혔더니반응이 괜찮았다. 경험에 근거한 귀납 추론은 그 예가 아무리 무수하더라도 그 원리상반증 가능한 예가 나오기 전까지만 참일뿐이라는 요지--그래서 경험주의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첫번째장문의 글쓰기를 받아 채점 하는데, 문법은 고사하고 글의 전개가 영 시원찮은 글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사실 우리말이든 영어든 글쓰는 요령은 비슷하다. 다만 미국얘들이 더 두괄식을 선호하긴 하는데 그걸 강요하진 않겠다고 했다. 학부 초년생들한테 너무 큰 기대하는게 아닌 건 아는데, 이걸 하루 아침에 고쳐줄 순 없으니 어찌할지조금 난감한 지금.

박사과정을 보통 6년으로 잡는다면이제 막 반환점을 돈 셈이다. 공부만으로만 본다면 2년은 코스웍한다고 그렇게 보냈고 1년은 내가 보고 싶은 책 읽는다고 그리 보냈는데 조금 아쉽게 느껴진다. 물론 이곳에 있어 생기는 삶의 단조로움이 공부의 능률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 고대 대학원 건물에서 공부하다 밖에 나와 커피 한잔에 담배 한대 피면서 벤치에 앉아 노닥거린 때가 그립다. 또 유학나와 보니 새삼 고대 캠퍼스가멋지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참 여러사람들이랑 술도 많이 먹고 당구도 밤새 가며 쳤는데,뭐 공부도 그렇다고 열심히 안한 건 아니었고.하긴 그땐 나이에 대한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지...

아마도 논문은 조지 엘리엇과 존 쿳시에 관한 글이 될 것 같다. 18세기까지 끌어오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다만 'truth'를 픽션이라는 장르에서 재현한다는 것에서,타자를 나의 관점에서 읽으려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리얼리즘의 문제라고 여겼다. 무엇보다 그런 영감을 준 건 오페럴 교수가 선물한 존 쿳시의 [Elizabeth Costello]였다. 참 할 얘기가 많아진다.우리가 동물들과 공감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나? 내가 전에 이성복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느낀 동일한 감정이떠올랐다.육식과 채식의 논쟁, 동정심의 문제 등등. 지난 여름에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1인칭 화자의 고백적 글쓰기가truth의 재현 문제의 핵심에 있다고 직감했고 그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여기와서 읽은 것 중에 인상에 남는 작품은 이것과 그의 다른 몇 소설들, 그리고 아룬다티 로이와 나집 마흐프즈의 소설 정도.조지 엘리엇과 쿳시가 정말 어떻게 맺어질지나도 조금 고민된다. 타자의 입장을 상상하는 일은 어쩌면 미학적 판단에 가까운 취미판단이다. 내가 가진 감정이나 취향을 남들에게 똑같이 느끼라고강요할 순 없다. 그건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이반의 생각과 같이 또 하나의 폭력이다.객관적 진리라고 강요할순없기에 동정심 역시 상호주관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사 칸트로의 회귀인가? 감정에 기초한 도덕적 판단이 윤리와 구별되는 게 칸트의 제 2비판이라면 취미판단--제 3비판--에 근거한 그의 공통감각론은--다분히 도덕성의 근간을 이루는-- 윤리적인 것과 별개인가? 그렇지 않다.

최근에빅토리아 소설 연구자인 조지 레빈의 글에 이 두 작가의 연결이 보인다. 반가웠다. 그는 이런 나의 시도가 무의미하지 않다는확신을주었다. 다만 조지 엘리엇의 경우 윤리와 도덕의 구분이 필요하다. 물론 내 입장도 이 부분에서 갈림길에 있다.

from Middlmarch

The element of tragedy which lies in the very fact of frequency, has not yet wrought itself into the coarse emotions of mankind; and perhaps our frames could hardly bear much of it. If we had a keen vision and feeling of all ordinary human life, it would be like hearing the grass grow and the squirrel’s heart beat, and we should die of that roar which lies on the other side of silence. As it is, the quickest of us walk about well wadded with stupidity

from Daniel Deronda

"Perspective, as its inventor remarked, is a beautiful thing. What horrors of damp huts, where human beings languish, may not become picturesque through aerial distance! What hymning of cancerous vices may we not languish over as sublimest art in the safe remoteness of a strange language and artificial phrase! Yet we keep a repugnance to rheumatism and other painful effects when presented in our personal exper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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