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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5 신록예찬(新綠禮讚) - 이양하
- 2015.03.19 삶의 양식
- 2015.02.10 김상봉 - 사랑하는 소녀에게 바치는 감사의 인사
- 2015.02.02 주말 덕유산 여행
신록예찬(新綠禮讚) - 이양하
군산의 제일 보물은 월명공원이다. 지금의 월명산의 푸르름은 월명호의 연꽃과 잘 어울린다.
신록예찬(新綠禮讚)
- 이양하(李敭河)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四時)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나타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萬山)에 녹엽(綠葉)이 싹트는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오늘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말고, 우리 연전(延專)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 시간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 놓은 듯이 옷을 훨훨 떨며, 본관 서쪽 숲 사이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아 올라간다. 나의 자리래야 솔밭 사이에 있는, 겨우 걸터앉을 만한 조그마한 소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오고 가는 여러 동료가 나의 자리라고 명명(命名)하여 주고, 또 나 자신도 하룻동안에 가장 기쁜 시간을 이 자리에서 가질 수 있으므로,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한 특권이나 차지하는 듯이, 이 자리를 찾아 올라와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물론, 나에게 멀리 군속(群俗)을 떠나 고고(孤高)한 가운데 처하기를 원하는 선골(仙骨)이 있다거나, 또는 나의 성미가 남달리 괴팍하여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 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있고, 황홀(恍惚)한 신록이 모든 산, 모든 언덕을 덮는 이 때, 기쁨의 속삭임이 하늘과 땅,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 사이에 은밀히 수수(授受)되고, 그들의 기쁨의 노래가 금시라도 우렁차게 터져 나와, 산과 들을 흔들 듯한 이러한 때를 당하면, 나는 곁에 비록 친한 동무가 있고,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자연에 곁눈을 팔지 않을 수 없으며,그의 기쁨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사람이란― 세속에 얽매여,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또는 오욕 칠정(汚辱七情)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데 마음에 영일(寧日)을 가지지 못하는 우리 사람이란, 어떻게 비소(卑小)하고 어떻게 저속한 것인지, 결국은 이 대자연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조화를 깨뜨리는 한 오점(汚點) 또는 한 잡음(雜音)밖에 되어 보이지 아니하여, 될 수 있으면 이러한 때를 타서,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을 떠나, 사람의 일을 잊고, 풀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한가지로 숨쉬고 느끼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사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씨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 나의 모든 욕망(欲望)과 굴욕(屈辱)과 고통(苦痛)과 곤란(困難)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별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말하자면, 나의 흉중(胸中)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眼前)에도 신록이다. 주객 일체(主客一體), 물심일여(物心一如)라 할까, 현요(眩耀)하다 할까,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장무애(無障無 ), 이러한 때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가진 듯이 행복스럽고, 또 이러한 때 나에게는 아무런 감각의 혼란(混亂)도 없고, 심정의 고갈(枯渴)도 없고, 다만 무한한 풍부의 유열(愉悅)과 평화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때에 비로소 나는 모든 오욕(汚辱)과 모든 우울(憂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고, 나의 마음의 상극(相剋)과 갈등(葛藤)을 극복하고 고양(高揚)하여, 조화 있고 질서 있는 세계에까지 높인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에, 초록(草綠)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淸濁)이 없다. 가장 연한 것에서 가장 짙은 것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초록에도 짧으나마 일생이 있다. 봄바람을 타고 새 움과 어린 잎이 돋아 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 한다면, 삼복 염천(三伏炎天) 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짓는 때를 그의 장년 내지 노년이라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取捨)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 시대― 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淡綠)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이 시대는 신록에 있어서 불행히 짧다.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혹 2, 3주일을 셀 수 있으나,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불과 3, 4일이 되지 못하여,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이 짧은 동안의 신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으로 비할 데가 없다. 초록이 비록 소박(素朴)하고 겸허(謙虛)한 빛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때의 초록은 그의 아름다움에 있어, 어떤 색채에도 뒤서지 아니할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고귀한 순간의 단풍(丹楓) 또는 낙엽송(落葉松)을 보라. 그것이 드물다 하면, 이즈음의 도토리, 버들, 또는 임간(林間)에 있는 이름 없는 이 풀 저 풀을 보라 그의 청신한 자색(姿色), 그의 보드라운 감촉, 그리고 그의 그윽하고 아담(雅淡)한 향훈(香薰), 참으로 놀랄 만한 자연의 극치(極致)의 하나가 아니며, 또 우리가 충심으로 찬미하고 감사를 드릴 만한 자연의 아름다운 혜택의 하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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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 군산대에서 강의 두 개를 배정 받았다. 하나는 전공과목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 교류실에서 의뢰한 외국 학생들 대상의 <한국의 이해>라는 수업이다. 한국의 이해라.... 누가 정했는진 몰라도 조금 난감한 제목의 수업임에 틀림없었다. 강의 방식이나 교재 선택을 나에게 전적으로 맡긴 것이어서 일단 내가 편집한 교재 표지 앞면엔 "Introduction to Korean Culture and History" 문구를 넣었다. 그게 그나마 덜 어색해 보였고 다른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같은 타이틀의 수업이 있음을 확인했다.
현대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한국을 다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애초에 말도 안되는 일이다. 관심을 한국 전쟁과 산업화 문제로 한정시켰다. 그리고 영어로 번역된 이문열의 <<아우와의 만남>>과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몆 부분, 일조각 출판사에서 나온 Korean Old and New : A History 중에서 해방 이후 부분만을 발췌해 낱권을 만들었다.
중국학생들이 많다. 열 아홉명. 군산대와 자매 결연을 맺은 절강 해양대학과 또 하나. 산동 무슨 대학에서 왔다고 했다. 나머지 캄보디아에서 온 두 학생이 있다. 그런데 이 두 학생이 더 영어 소통을 잘하고 또 영리해 보인다. 그렇다, 문제는 모두가 영어를 잘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말도 못하는 내가 가끔 칠판에 한자를 쓰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문열의 단편을 읽다가 한국의 지역감정을 설명하는 역자의 주석을 보고 쓴 웃음이 나왔다.영호남의 갈등에 대해, "The people of Jeolla-do, in the southwest of South Korea, and of Gyeongsang-do in the southeast, descendants of the Baekje and Silla kingdoms respectively, are very much different in temperament, and there is a widespread antagonism existing between them, which produces numerous social conflicts" (28). 글쎄, 이건 사실 보도가 아닌 주장에 가깝다. 일단 나 자신은 백제에 대한 호감은 있으되 백제만이 내 조상이라 생각한 적이 없고, 영남인들에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으며, 기실 지역마다 무슨 기질의 큰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지식 전달자가 벌 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별 거 라는 생각이 이럴 땐 든다. 프란체스코 교황도 교사라는 직분의 고귀함을 얼마전 말하지 않았던가. 일단 정확한 사실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 표현은 논리적이고 명료해야 한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전을>>을 삼분의 이 쯤 함께 봤다. 이몽룡이 남원에 다시 돌아와 주변의 산자락을 둘러 보면서 진양조 가락의 판소리가 나오는 대목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의 다른 영화, <<씨받이>>에서 희뿌연한 새벽에 여인이 고무신을 신고 한옥을 거니는 장면을 여전히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다. 조상현 명창이 영화속에서 무대에 올라 관객과 호흡하는 장면을 학생들도 분명 느꼈으리라 여겨진다.
새로운 내용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는 터라 적잖이 신경이 쓰인다. 대충 하라고 어느 선배가 말하지만 그 대충이라는 게 어렵다. 피로가 쌓였는지 입안에 빨간 멍울이 생겼을 땐 덜컥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다시 아물고 일할 수 있으니 감사하지 아니한가.
한시간 조금 넘는 시내 버스 안에서 킨들을 들여다 보는 것이 그나마 괜찮다. 책 보는데 버스가 지하철만은 못하다. 어제 읽은 Walden의 한 대목:
As I preferred some things to others, and especially valued my freedom, as I could fare hard and yet succeed well, I did not wish to spend my time in earning rich carpets or other fine furniture, or delicate cookery, or a house in the Grecian or the Gothic style just yet. If there are any to whom it is no interruption to acquire these things, and who know how to use them when acquired, I relinquish to them the pursuit. Some are “industrious,” and appear to love labor for its own sake, or perhaps because it keeps them out of worse mischief; to such I have at present nothing to say. Those who would not know what to do with more leisure than they now enjoy, I might advise to work twice as hard as they do,–work till they pay for themselves, and get their free papers. For myself I found that the occupation of a day-laborer was the most independent of any, especially as it required only thirty or forty days in a year to support one. The laborer’s day ends with the going down of the sun, and he is then free to devote himself to his chosen pursuit, independent of his labor; but his employer, who speculates from month to month, has no respite from one end of the year to the other.
In short, I am convinced, both by faith and experience, that to maintain one’s self on this earth is not a hardship but a pastime, if we will live simply and wisely; as the pursuits of the simpler nations are still the sports of the more artificial. It is not necessary that a man should earn his living by the sweat of his brow, unless he sweats more easier than I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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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 사랑하는 소녀에게 바치는 감사의 인사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2003)
나 어릴 때
남들처럼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보는 것이 꿈이던 소녀가 있었다.
내가 학교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을 때
그 소녀는 전태일과 평화시장 미싱 앞에
앉아 있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그리고 가을도 지나
전태일도 평화시장을 떠나고
다시 겨울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소녀가 교복 대신
의정부행 12번 버스 안내양의 제복을 입고
버스 계단에서 졸다가
문을 여닫으며, 차가운 겨울 바람 속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타인의 꿈속에서만 숨쉬고
나 또한 너의 꿈속에서 자랐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나 지금 네가 쓰러지던 얼음바람 속으로
다시 돌아와
의정부 가는 12번 버스 계단을 오르며
남들처럼 예쁜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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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선생을 한 번 뵌 적이 있다.
내가 학술부장으로 일했던 십여 년 전이었다.
기획한 주제 강좌 원고 인쇄본을 전해 드리기 위해 종로의 문예 아카데미에 찾아갔다.
선생은 작은 키에 선한 인상으로 말씨는 퍽 겸손하셨지만 강단이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과는 제 글이나 생각이 다른 것 같네요."
민족주의와 관련, 아마도 헤겔의 이론을 적용한, "서로 주체성"이라는 개념이 주가 된 강연으로 기억한다.
강연이 끝나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에 대한 여러 다른 지휘자들의 해석을 말했다.
글이 깨끗하고 읽기 쉬우면서도 통찰력이 있다.
가끔 철학한다는 사람들의 독선적인 태도를 마주할 때 불편한 마음이 드는데, 선생은 그런 부류와 친해질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슬픔"에 대한 사유를 한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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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무주계'라 불리는 친구들 모임이 주말에 있어 시간이 빈 김에 근처 덕유산에 태훈이와 놀러갔다. 거의 산악인이라 볼 수 있는 이 친구는 모든 준비 도구와 먹을 거리를 가져와 나의 등반을 쉽개 해주었다. 나 때문에 욕봤네. 간만에 다리 뻐근하게 겨울 산을 오른 것 같다. 날이 좋아 향적봉에서 지리산까지 시선이 닿았다. 오면서 완주에 있는 오스 갤러리에 들러 내 평생 가장 비싼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신 것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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