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 같은 시기에 신을 말하고 진리를 논하는 것은 고리타분하고, 비웃음과 함께 반동적(regressive)이란 소리밖에 안듣는다. 신의 사랑과 자비를 말한다면 어느 누구의 신이 들어줄까. 사람따라 신따라 다르다. 같은 기독교 축구 감독 둘--한 명은 수원의 차범근 다른 한명은 어느 누구였던가?--이 우승을 놓고 시합할 때 누구의 기도빨이 쎈가에 따라 승부가 결정될 거란 우스개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뼈아픈 지적이어서 마냥 웃지만은 못하였다."알라는 위대하다"라면서 사람들을 쏴죽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왜 "알라"를 감히 들먹이나. 그러면 "여호와"는 가만있나? 싸울려면 신들끼리 싸워라, 왜 애먼 피조물이 싸우게 신(들)은 놔두는가.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에서, 가령 수사학적 언론보도를 통해 내가 먼저 접하는 것은, 일단 희생된 피해자들에 대한 유감과 함께 가차없는 보복의 정당성을 말하는 프랑스 지도자의 언급이다. 일면 이해는 간다. 그런데,그렇다면 종래에 또다른 피바람이 중동 땅에 불 것이고 또 그 지겨운 악순환은 유럽과 지중해 연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누구의 책임인가? 이러할 때 수사학적 상황은 고정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당연히 역사적 접근의 선이해가 필요하고 어느 선까지 분석의 한계를 정할지가 논쟁거리이다. 가령, 누가 시리아 난민과 ISIS의 발흥을 서구 열강의 개입과 분리시켜 생각하겠는가? 더 나아가 오늘의 중동의 분열을 초래한 것이 과연 누구였던가? Who is the final guarantor of which rhetorical situation is the real one? What if there are infinite(or indefinite), successive meta-situations that condition the present situation?
박근혜는 터키로 도망가고 어제 시위대 중 한 노인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는 기사를 접했다. 나와 더 가까이 있는 사실이다. 분노를 느낄 일이다. 수업때문에 <<난쏘공>>을 조금 읽고 전태일과 조영래를 다시 생각하고, 창가에 앉아 떨어진 은행나뭇잎들을 바라본다 .
내가 쿳시와 비트겐슈타인에 끌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 것truth telling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 혹은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말이나 글이 오가면서 벌어지는 오해와 왜곡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갖고 있다. 억울함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어렸을 적엔 그 때문에 운 적도 몇 번 있다. (울면 진심이 통하나?)
쿳시의 영향이겠지만 자서전이나 고백록에 대한 관심이 있다. 그의 엄격하고 세심한 관찰은 본받아야 한다. 그에겐 어떤 이의 온전한 진심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것이 하나의 도약으로 간주된다. 거기에 은총이 있다.
신실함sincerity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어가 인간의 감정, 인상, 특히 고통과 같은 신체적 현상에 유리되는 것을, 차라리 별개의 것임을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론"은 암시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하라는 말이 비언어적 "세계" (하이데거적인) 라는 외집합을 동반한다. 거기까지 인간 세계이다.
언어의 화용론과 별도로, 서양 철학의 이성은 곧 로고스의 세계란 흔한 말이 여기서 위태롭다.
가령, 주변의 동물을 만나면 언어는 무소용이다. (고로 혹여 있다 하더라도 외계 생명체가 우리를 알아 먹을 수 없을 건 뻔한 이치이다.) 사자의 말이 예로 나오는 것, 즉, 그것의 이해불가능성은 역으로 인간 언어의 어떤 내성을 지적하는 것과 관련있다.
(늑대아이 혹은 야생에 버려진 아기가 인간 사회에 제대로 동화된 적이 없다 들었는데 그 때문일까)
니체가 이미 비슷하게, 그리고 훨씬 전에 장자가 그 비슷한 인간의 언어관과 진리관의 허술함을 비판하였다. 어디까지나 인간세계의 환원주의적 관점의 소산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하여 불립문자와 같은 패러독스는 적합하지 않다.
문학의 "느낌" 그리고 그것의 위로는 누가 말한 하나의 "힘"과 같다. 즉 움직이게 만든다. 언어 너머의 무엇을 손짓하는가.
음악이라는 공기의 파동은 어떠한 언어이고, 음악의 감동은, 곧 느껴서 움직임은 -- 인간을 너머 동식물에게 이르기까지--왜 일어나는가. 그 조응은 어떠한 원리에서 발생하는가.
진실이란 결국 인간이 살기 위해 있는 것 아닐까. 언어란 그래서 그렇게 있는 것인가. 바람과 풀과 대지, 그 움직임, 그리고 시적 언어. 김수영과 왈라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는 함께 비교해 볼 수 있다.
저녁이 있는 삶도 중요하지만 아침이 있는 삶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짧지 않은 미국 텍사스와 여름 방학 때마다 가 있던 보스턴 체류 기간 중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아침에 빵집이나 찻집에 앉아 신문이나 책을 보는 중년과 노년의 모습이었다. 부러웠고 보기 좋았다. 월광 소나타가 이른 아침에도 어울리는지 처음 알았다. 물론 다 그럴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여유는 돈이니까. 그러나 별로 돈도 없는 나는 지금 여기 군산의 한 빵집에 앉아 이런 글을 끄적거리며 클래식 음악을 듣는 호사를 누린다. 매여 있지 않아 그럴지도 모른다. 마음은 자유다.
증언으로서, 참과 거짓으로서, 의식과 무의식으로서, 한 발언의 판단 여부
testimony
사도와 증거하는 이가 가지는 의미
바디우와 아감벤의 사도 바울 서적 읽어 볼 것
푸코의 강연록에 등장하는 법정과 진술의 관계
로고스로서의 이성, 언어화 이전의 느낌, 고통의 전달 불가능성
비트겐슈타인과 동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