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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0.01 마라톤을 뛰는 기분 2
- 2008.03.17 그리움 2
- 2007.01.12 행복이라.. 4
- 2006.11.17 to be optimistic 6
마라톤을 뛰는 기분
공부하는 일 외에 가르치는 일이 이번 학기에 시작됐다.
그래서 쑥스럽지만애들한테서 받아보는 에세이 앞장에professor Ryu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오홋,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더군. 매주 월, 수, 금 한 시간씩 1,2 학년을 상대로 [작문과 수사학]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는데, 그 한 시간 강의에 이래저래 신경이 많이 쓰인다. 마찬가지로 이 곳에서작문 수업에 쏟아붇는 학교 측의 노력도 상당하다. 뭘 이렇게 여러가지로 세심하게 챙기려는지 조금 피곤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행히 파워포인트로 만든 기존 자료가 있어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일 뿐, 나도 조금 여러 궁리를 보탠다. 어차피 수업은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거니까. 그래서 가끔 전에 읽은 자료들을 끌어 온다.지난 시간엔 논리적 오류에 관한 여러 개념중 '성급한 일반화'의 예로러셀의 칠면조 일화를 읽혔더니반응이 괜찮았다. 경험에 근거한 귀납 추론은 그 예가 아무리 무수하더라도 그 원리상반증 가능한 예가 나오기 전까지만 참일뿐이라는 요지--그래서 경험주의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첫번째장문의 글쓰기를 받아 채점 하는데, 문법은 고사하고 글의 전개가 영 시원찮은 글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사실 우리말이든 영어든 글쓰는 요령은 비슷하다. 다만 미국얘들이 더 두괄식을 선호하긴 하는데 그걸 강요하진 않겠다고 했다. 학부 초년생들한테 너무 큰 기대하는게 아닌 건 아는데, 이걸 하루 아침에 고쳐줄 순 없으니 어찌할지조금 난감한 지금.
박사과정을 보통 6년으로 잡는다면이제 막 반환점을 돈 셈이다. 공부만으로만 본다면 2년은 코스웍한다고 그렇게 보냈고 1년은 내가 보고 싶은 책 읽는다고 그리 보냈는데 조금 아쉽게 느껴진다. 물론 이곳에 있어 생기는 삶의 단조로움이 공부의 능률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 고대 대학원 건물에서 공부하다 밖에 나와 커피 한잔에 담배 한대 피면서 벤치에 앉아 노닥거린 때가 그립다. 또 유학나와 보니 새삼 고대 캠퍼스가멋지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참 여러사람들이랑 술도 많이 먹고 당구도 밤새 가며 쳤는데,뭐 공부도 그렇다고 열심히 안한 건 아니었고.하긴 그땐 나이에 대한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지...
아마도 논문은 조지 엘리엇과 존 쿳시에 관한 글이 될 것 같다. 18세기까지 끌어오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다만 'truth'를 픽션이라는 장르에서 재현한다는 것에서,타자를 나의 관점에서 읽으려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리얼리즘의 문제라고 여겼다. 무엇보다 그런 영감을 준 건 오페럴 교수가 선물한 존 쿳시의 [Elizabeth Costello]였다. 참 할 얘기가 많아진다.우리가 동물들과 공감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나? 내가 전에 이성복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느낀 동일한 감정이떠올랐다.육식과 채식의 논쟁, 동정심의 문제 등등. 지난 여름에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1인칭 화자의 고백적 글쓰기가truth의 재현 문제의 핵심에 있다고 직감했고 그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여기와서 읽은 것 중에 인상에 남는 작품은 이것과 그의 다른 몇 소설들, 그리고 아룬다티 로이와 나집 마흐프즈의 소설 정도.조지 엘리엇과 쿳시가 정말 어떻게 맺어질지나도 조금 고민된다. 타자의 입장을 상상하는 일은 어쩌면 미학적 판단에 가까운 취미판단이다. 내가 가진 감정이나 취향을 남들에게 똑같이 느끼라고강요할 순 없다. 그건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이반의 생각과 같이 또 하나의 폭력이다.객관적 진리라고 강요할순없기에 동정심 역시 상호주관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사 칸트로의 회귀인가? 감정에 기초한 도덕적 판단이 윤리와 구별되는 게 칸트의 제 2비판이라면 취미판단--제 3비판--에 근거한 그의 공통감각론은--다분히 도덕성의 근간을 이루는-- 윤리적인 것과 별개인가? 그렇지 않다.
최근에빅토리아 소설 연구자인 조지 레빈의 글에 이 두 작가의 연결이 보인다. 반가웠다. 그는 이런 나의 시도가 무의미하지 않다는확신을주었다. 다만 조지 엘리엇의 경우 윤리와 도덕의 구분이 필요하다. 물론 내 입장도 이 부분에서 갈림길에 있다.
from Middlmarch
“The element of tragedy which lies in the very fact of frequency, has not yet wrought itself into the coarse emotions of mankind; and perhaps our frames could hardly bear much of it. If we had a keen vision and feeling of all ordinary human life, it would be like hearing the grass grow and the squirrel’s heart beat, and we should die of that roar which lies on the other side of silence. As it is, the quickest of us walk about well wadded with stupidity”
from Daniel Deronda
"Perspective, as its inventor remarked, is a beautiful thing. What horrors of damp huts, where human beings languish, may not become picturesque through aerial distance! What hymning of cancerous vices may we not languish over as sublimest art in the safe remoteness of a strange language and artificial phrase! Yet we keep a repugnance to rheumatism and other painful effects when presented in our personal experience."
객지에 있어 생기는 감정은 뭣보다 그리움이다.
이제 거의 2년을 지내는 시점이어서 고향, 가족, 친구들, 그리고 학교를 그리는 맘이 간절하다. 가끔 감상적이 된다.
아마 이런 감정을 가장 근접하게 느껴 본 적은 군대 간 시절이었을 것이다. 쉽게 가 볼 수 없는 형편이 비슷한 것이었으니.
그렇게 비유하는게 꼭 좋은 건 아닌데 말이다, 군대를 혐오하면서도 이렇게 연관을 짓는 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계획에 차질이 생겨그 긴 여름 방학에도 한국에 못갈지 모르겠다.
그리 되면 여기서 가볼 데를 알아봐야 겠다.
이번 봄 방학은조금 심하게 놀았다. 일이 있더라도 가급적 나중에몰아하기로 작정하고, 술도 먹고 멀리 바다보러 나가기도
했다. 키마라는 놀이터에서 청룡열차도 가고 휴스턴을 들러 갤브스턴에 도착해 이틀을 묵으며 게도 잡고 회도 먹고
바다를 구경 했다.태어난 곳이 항구여서 바다를 항상 보며 살았으므로 낯설지는 않았다. 바다는 연이어 있겠지만 묘한 이질
감이 인다. 멕시코 만의 바다를 보는 건 작년 여름의 사우스 파드레에 이어 두 번째다.
다시 돌아오니.일은 쌓여 있고 하기가 싫구나.
2008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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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언제입니까?"
내가 어제 말하기 시험에서 받은 질문 중에 이런 게 있었다. 물론 다른 것도 있었는데역사적인 한 인물과 만난다면 무슨 얘기를 할래요? 그 사람은 누구죠? 등등. 난Jesus라고대답했다.ELPE 시험이라는 게 있어 작문, 독해, 말하기 각 부분에서 80점이 넘어야 여기 애들 티칭하는 자리를 준다. 가장 행복했던 때라, 생각만 해도 달콤하지, 하하. 난 조금 멋적은 표정으로, 약간 웃음이 나오면서,할 수 없다는 듯이, 마치 고백하는 심정으로, 또 그 옛날 얘기를 잠시 읊어댔다.때는 바야흐로 내가 대학 초년생이 되어벚꽃이 만발하였을 쯤이었단다,어울렁 더울렁~
사실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이젠 그만 떠올렸으면 하는 기억이기도 하다. 애써 기억해 낸 게그거라니... "가장"이라는 말도 이럴 땐 조금 난감하여 그렇게까지 의미부여를 해야하는지망설여진다. 아무튼 과거는 과거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마는~"이라는 가사도 있잖아. 그럼 내가 불행하냐? 그렇지는 않은 거 같다. 옛날 희랍인들이 행복의 조건으로 아타락시아ataraxia(부동심 혹은 고통이 없는 상태)나 아파테이아apatheia(무정념) 같은 말을 써가며, 무엇이 없으면 그 반대가 실현되는 것으로 정의했지만 행복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해서 불행하다고 말하면 그건 조금 맞지 않는 거 같다. 언어의 한계다. 벤야민의 글에서 읽었던 바, 횔덜린은 행복한 신은 운명이 없다고 하였는데, 운명이 없다는 건 그 운명이 결부시키려는 죄와 불행을 겪지 않는다는 말도 되지만 한편으로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말도 되겠다. 시간이 매개되는 기억이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지 않고 행복을 생각할 수 있을까? 현재의궁핍하고 곤란한 처지에서 과거의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 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는 말(단테의싯구로 기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행복이 무엇일까에 대해지금 떠오르는 것은 동성 형과의 대화이다. 시간과 관련된 얘기는 아니다. 지극히 올바르고 상식적인 말인데도 그런 말을 해 준사람이 주변에 없어서인지 형의 얘기만이 기억에 남아있는 거 같다. 굳이 경쟁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나이에 맞게 사회에서 주어지고 내가 찾을 수 있는 그 직업을 좇아 살고, 제도권의 공부가 중간에 맞지 않아 다른 일을 하더라도 미련을 갖지 않을 수 있는 마음가짐. 어쩌면 대학원 생활이내가 성인으로 자라나는데지장을 줄 수도 있다는 말. 형은 게리 스나이더로 석사 논문을 썼지만 꼭 그시인의 영향때문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런마음의 자세가 전부터있던 사람이라 믿는다. 그런 형의 모습이 자유로워보였다.
마음의 평정을 지속하려 한다.그런 점에서 고대 희랍인들의 생각이 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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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optimistic
오늘로 이번 학기 나의 발표를 끝마쳤다.
생각한 것만큼 잘한 것은 아니었고 걱정했던 것만큼 못한 것은 아니었다.
수업듣는 선생님들이 등치가 커서 그런지 맘이 좋고 유머 감각이 있다. 이해심있게 들어준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는다.
오늘 다룬 작품에선 19세기 유태인 문제가 거론되었기에맑스의 관련 글 하나를 전에 읽은것이 도움이 되었다. 물론 듣는 아이들이 내 말을 얼마나 이해했을런지는 모르지만.
소설공부에서 루카치와 바흐친은 고전 중의 고전이라 다 가져왔고 잘한 거 같다. Dialogic Imagination 의 일부분을 읽게 되었는데 Dr. O'Farrell이랑 이견이 있었지만더 나가지 않았다. '대화적'인 것을 너무 voice에 한정시키는 듯. 그래도 맘씨 고운 노처녀 교수님이랑 싸우고 싶지 않았다.
다음주는 추수감사절이라 한 주 쉰다.
역시 박사 첫학기는 이런 거구나라는 끄덕임.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거다.